나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오죽하면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된 노래도 소설책도 싫어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열병을 앓고 진도에서 목포까지 가서 침을 맞았는데 그게 잘못 돼 말하는 기능을 잃으셨다. 한마디로 벙어리가 되셨다. 그 뒤로 할머니는 아버지는 할머니의 치마폭에서 지냈고 성인이 됐지만 아버지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할머니는 90살이 넘게 살으셨다. 아들을 두고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으셨는지 한 달을 끙끙 앓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내 꿈에 나오셔서 아버지 안부보다는 형제지간에 잘하라고 하셨다. 그 꿈을 꾼 후 일주일 뒤에 돌아가셨다.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자신이 아버지께 할 만큼 다 하셨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아버지를 더 많이 구박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를고 화를 내셨다. 그 모습이 싫었지만 딱히 내색하진 않았다. 나도 아버지가 무척 싫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시골집이라 마당 한쪽에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모터가 있었다. 6살 때 나는 그 모터 주위에 예쁜 꽃을 심고 화단을 꾸몄다. 그걸 본 아버지께서 화를 내시며 마구 함부로 밟으셨다. 그곳에 그걸 심으면 안 된다고 차근차근 설명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내게 소리 지르며 화를 내셨다. 아버지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본 나는 아버지가 무섭고 내가 소중하게 아끼는 작은 화단을 짓밟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내게 화를 내신적이 없다. 그럼에도 꾸준히 나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어느 날은 거울을 가지고 햇빛에 반사하는 빛이 예뻐서 한참을 놀고 있는데 옆집 말 못 하는 오빠가 갑자기 화를 내며 낫을 들고 나를 죽이겠다며 쫓아온 적이 있다. 거울에 반사되는 빛이 옆집 오빠의 심기를 거슬린 모양이다. 그때 아버지는 더 크게 화를 내며 그 오빠를 쫓아낸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은 조금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말을 못 하는 장애인이라는 점을 부끄럽지는 않았다. 친구들이 놀려도 그 친구들과 안 놀면 되니 놀리든 말든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말 못 하는 아버지를 둔 나를 친구 엄마가 호되게 구박하고 따돌려도 그러려니 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미선언니와 유미 언니가 너를 혼내는 아주머니가 나쁜 사람이라고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 줬기 때문에 크게 위축되거나 상처로 남지 않았던 것 같다.
언젠가 엄마는 동네 엄마에게 크게 호되게 당하고 있었다. 엄마는 말을 아주 못 하는 건 아니고 귀가 잘 안 들리신다. 어렸을 때 소아 열병을 앓고 귀가 잘 안 들리시게 됐다. 그 분은 엄마보다 증상이 심해 말을 아예 못 하는 동네 아줌마였는데 엄마와 싸움이 나서 그 아줌마가 호미를 들고 엄마에게 화를 냈었다. 할머니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던 목포에 사는 고모는 9살인 내게 혼을 냈다.
"너는 엄마가 그렇게 당하면 당당하게 나가서 엄마를 구해야지 그렇게 생각 없이 집에만 있으면 되겠냐 너네 엄마는 말을 잘 못하니까 네가 달려 나가서 도와야지"
그 말을 들은 뒤부터 나에게 부모님은 의지의 대상이 아닌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됐다. 어머니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버지까지 보호해야 되는 현실이 부담스럽고 싫기도 했는지 그 뒤로 주변에 아버지라는 단어조차 꺼내지 않았다. 가족관계 증명서에 기재된 글자 그대로 아버지다.
아버지는 매일 같이 밭에 나가서 이것저것 살폈다. 딱히 농사를 지을 줄 모르지만 그렇다고 전혀 못하시는 건 아니니까 밭에 나가시는 걸 좋아하셨다. 어느 날 밭에 나가셨는데 어떤 남자가 더 이상 이곳에 오지 말라고 아버지를 밀쳐 내셨다. 작은 오빠의 사업 실패로 논과 밭 이천평이 넘는 땅이 경매로 넘어갔다. 그 사람은 우리밭의 새 주인이었다. 땅을 잃어버린 충격으로 아버지는 아파서 자리에 누우셨다.
병세가 심해져 병원에 입원하시다가 더는 치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아버지는 요양원으로 가셨다.
명절을 일주일 앞두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하필 급하게 마감해야 할 책이 있어 정신이 없었다. 내려가야 할 걸 알면서도 마감 때문에 답답했다. 아버지가 조금만 견뎌 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 조금만 참아 곧 내려갈게'
마음속 외침이 끝나자마자 작은오빠에게 괜찮아지셨다고 연락을 받았었다.
무사히 마감을 끝내고 진도에 내려갔다. 바로 요양원으로 가려했더니 작은 오빠가 자주 가면 간호사들이 화낸다고 본인이 다녀왔으니 나에게는 명절 끝날 때쯤에 방문하라고 했다.
그래도 그럴 수 없어 아버지 병실에 밤늦게 찾아갔었다. 하얀 이불에 덮여 가만히 누워있는 아버지 얼굴에는 병상의 고통이 고스란히 얼굴에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산소마스크까지 하고 계셨다. 나는 가만히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며칠 뒤면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내가 없는 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실까 봐 걱정이 됐었다.
'아버지 나 왔어, 이제 괜찮아, 그만 가셔도 돼'
시간이 멈춘듯한 정적이 흐르고 서늘한 바람이 병실을 휘 돌며 나가더니 갑자기 산소 호흡기 계기판에서 '삐'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 간호사가 뛰어 왔었다.
"세상에 막내딸 보려고 그 힘든 시간 버텼나 보네요"
아버지께 미안했다. 마감이 뭐라고 그냥 바로 내려올걸 바보 같은 내가 미웠다. 다행히 아버지는 내가 미워한 줄도 싫어한 줄도 모르고 그렇게 가셨다. 병원비를 못내 사망신고 진단서를 못 받아서 장례를 못치를 수 있다고 다급하게 작은 오빠가 나를 찾았다. 밀렸던 병원비를 치르고 나서야 아버지를 화장터까지 보낼 수 있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울지 못했다. 아버지를 싫어했기보다는 이것저것 신경 쓸게 많아 온전히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울기보단 홍어 무침을 더 시켜 달라는 장례식장에 찾아와서 조의를 표하는 사람의 부탁을 처리해야 했다.
화장터에서는 화장하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 시간을 갖게 해 줬다. 아버지는 삼베옷을 입고 편안히 누워 계셨다. 그날 처음으로 아버지가 말끔하게 차려입고 계셨다. 나는 그동안 허름한 옷만 입고 계셨던 나의 아버지를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엄마 손은 농사일로 거칠어서 굳은살 투성인데 아버지의 곱디 고운 예쁜 손이 그렇게 미워서 허름한 옷을 마땅하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화장하기전 삼베옷을 입고 계신 아버지의 환한 얼굴을 보니 가슴이 사무치게 아팠다.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옷을 사드린 적이 없단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한없이 울었다. 휴가 때 집에 찾아가서 아파서 누워 계셨던 아버지 기저귀도 갈아드리고 맛있는 것을 해드린 것으로 난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제대로 해드린 게 없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자식을 키워보니 부모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이제는 아버지가 밉지도 싫지도 않다. 아버지 관련 책도 읽고 노래도 듣고 이렇게 글을 쓸수 있게 됐다. 가끔 아버지께 못해드린 옷 한벌이 여전히 응어리처럼 남아있다. 다만 욕심이라면 아버지께서 부족하고 어리석은 딸을 남겨두고 너무 멀리 가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기처럼 조금 멀게 때로는 조금 가깝게 내 마음속에 계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