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아내로 산지 지난 3년을 돌아보며
뜬금 없이 결혼을 선언한 3년 전 나는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 독립과 대학 졸업 후 안정된 직장을 다니던 20대 중후반의 삶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빛이 났다. 독신이나 비혼주의는 아니었지만 당시의 나는 혼자서 꾸려가는 삶에 취해있었다. 그리하여 언제 결혼이란 걸 한다 해도 현재의 인생이 아깝게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혼자 사는 햇수가 늘어가며 오히려 본가를 갔을땐 편치 않은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나중엔 가족과 같이 TV를 보는 것조차 불편해져 내리 방 안에 있다 자취집으로 돌아가기 일수였다. 살아보기 전엔 미처 몰랐다. ‘혼자’라는 삶의 양식이 그토록 체질일 줄은.
그즈음의 나는 믿고 있었다.
혼자는 질서와 닮았다고. 빠르고, 편하고, 아름다운 것.
-김하나,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대학 캠퍼스 커플로 만나 내가 겨우 독립을 도모했던 나이인 이십대 중반에 결혼하셨다.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모범 답안같은 분들이었고 나 또한 그런 전형적인 한국의 부모상을 보며 성장했다. 내 나이 스물 여섯 즈음이 되자 정해진 수순을 밟듯 부모님으로부터 결혼에 대한 압박이 시작됐다. 만나는 사람은 있느냐, 누구를 한 번 만나보겠느냐, 나아가서는 (나의 모든 연애사를 철저히 비밀로 부쳤던 터라) 혹시 동성을 좋아하느냐는 어처구니 없는 의심까지 쏘아 붙이기도 했다. 다시 떠올려도 숨통을 조여오던 그 몇 년간의 대치 속에서 결혼에 대한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꼽자면 단연 24살 때의 독립이다. 나는 가족들의 반대와 아늑한 집을 뒤로하고 기어이 신촌 반지하 월세방으로 들어갔다. 효율적인 취업 준비를 핑계삼았지만 대학 졸업 직전 무리해서 독립을 저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느 날 집에 귀가하여 이제는 이 '불행'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켜야겠다 결심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큰 사고가 일어나 집안은 몇 년째 조용할 날이 없었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 닥친 생경한 비극을 겪으며 깨달았다. 어른 또한 별수없이 불완전한 존재이고 얼마든지 방황할 수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자식에게 그러하듯 부모님은 내가 유일하게 믿고 세상에 나온 원천이자 뿌리였다. 그런 두 사람이 결혼 30년 만에 닥친 위기로 서서히 무너지는 모습은 이미 성인이었던 나로서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매일 서로를 향해 오가는 고성과 눈물바람 속에 집안 어느 곳 하나 편히 있을 곳이 없었다. 그 가운데 나의 정신은 매일 조금씩 좀썩는 기분이 들더라. 나는 그 진창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인 독립을 단행한 것이다. 대신 빠른 취업으로 내 한 몸 알아서 건사한다면 자식으로서의 도리는 다 하는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가족의 품을 떠나 내 일에만 집중해 다행히도 졸업 직전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독립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부모님은 다시금 삐걱거릴지라도 결국 서로를 저버리지 않고 서서히 상처를 극복해갔다. 아마 일부의 상처는 묵인하고 체념한 체, 가정에 대한 책임감과 30년간 쌓인 그들 사이의 의리 덕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난 뒤에야 가족이란 정의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절대 무너질리 없다고 믿었던 가족의 행복이 어떠한 비극 앞에선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기에 우리는 각자에게 남은 환부를 품고서 결국 가족 안에 남은 것이다. 감당하기 힘들었던 실망과 포기, 그리고 희망으로의 회귀를 몇번이나 반복했을까. 그 가운데 독립은 이 모든 단상을 수없이 개워낼 수 있었던, 나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뭣 모른체 단순하고 명료해 보이던 '결혼'은 생각이 많아지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결혼에 대한 반감이 싹을 튼 건 단순히 혼자 사는 삶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가족간의 갈등이 커져 가는 동안에도 부모님은 잊지 않고 내게 결혼을 종용했다. 자신들은 서로 싸우며 자식에겐 ‘안정’이란 최대 효과를 근거로 결혼을 권장한다니. 도통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런 위선적인 태도가 나로 하여금 결혼이 인생의 미친 짓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 이르게 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것은 결혼이란 제도가 탄생시킬, 그것도 내가 주체가 되는 가족 안에서 일어날 수많은 갈등에 대한 미리 짐작의 염증때문이었으리라. 반대로 혼자라면 산뜻하고 홀가분하게 그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철저한 자기 방어적 선택일지라도, 그로 인해 평생이 고독할지라도, 어쩌면 그 편이 나에겐 더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본 부모님의 기대에 찬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생전 그 존재 여부조차 명확하게 밝힌 적이 없던 딸이 남자친구란 놈을 데려왔으니. 그런 내가 만난지 두어 달 밖에 안된 그를 흔쾌히 인사 시킨 데에는 사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해 온갖 두려움으로 가득차 아득하고도 무거웠던 머리가 말끔히 비워졌음을 뜻했다. 헤어지거나 헤어짐을 당한 이전의 연인들에게는 관계를 확장시키기엔 무한한 결격 사유가 있었다. (물론 나도 그들에게 그랬을 것임을 확신하는 바다) 그러므로 스쳐갔다는 데 애석함은 있을지라도 이견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렇게 나는 몇 번의 연애를 거쳐 만난 그를 통해 처음으로 믿게 되었다. ‘아, 이 놈이구나.’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주 깨끗하고 단순한 확신이 선다는, 진부하기 짝이 없기에 늘 흘려들었던 엄마의 말을. 결혼에 관해서라면 모든 것이 혼탁하기만 했던 내 마음에 확신이란 뿌리가 내린 것이다. 한 사람의 예기치 않은 등장이 그리도 어려웠던 결혼이란 난제를 이리도 쉽게 해결했다.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
그는 이제 거의 어떤 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처럼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그렇게 이것 저것 재고 따져볼 것 없이 나는 그와 남은 인생을 함께하기로 했다. 책임을 떠안고 싶지 않아서, 가족 안에서 상처받기 싫기에,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라는 역할에 따르는 무한한 부담감, 그리고 결국엔 온전한 내 자신을 잃게 될까봐... 결혼에 대해 물음표를 그릴 수밖에 없던 수백가지의 이유를 뒤로하고 결혼을 확신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두려움 건너 자리잡고 있던 ‘내가 이루고픈 가정’ 대한 동경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혼이란 결국 평범함에 잠식당해 특별할 것 하나 없을 일상을 배우자란 이름의 타인과 함께하고자 하는 것. 그러나 그 작은 일상만이 줄 수 있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행복이, 실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경외스러운 축복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날 우리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겪어내며 나는 그러한 행복이 결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아주 겸허히 배운 탓이었다.
결혼을 망설이는 누군가에게 제도로서의 결혼을 무시한 채 사랑하는 사람만을 보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결혼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줄줄이 사탕처럼 따라오는 역할들을 짊어지는 일에는 적지 않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혼의 숙명이라면, 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온 누군가와 평생을 전제로 한 타협과 인내를 거듭해야함은 매순간 서늘한 진땀을 빼게하는 결혼의 최고난이도 숙제다. 그리하여 결혼 생활은 매일이 크고 작은 전쟁일 수 밖에 없다. 누군가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전쟁을 기꺼이 함께 할만한 당신만의 전우를 찾으라 답하고 싶다. 단언컨대 부부간의 사랑을 전제로 한 전우애만큼 강한 신념은 없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상당히 무모하고도 모험적이었던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혼이란 불확실성에 내 인생을 맡긴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결혼은 내게 있어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정박케 하는 힘을 매일의 일상 속에서 얻게 해주었다. 이를 위해서 나와 완전히 다른 한 사람과 매일 전쟁을 치른다해도 그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우린 분명 연애 때 서로에게 마구 발산하던 페로몬 가득한 매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을 터. 각자의 다름이 미워 때로는 갖은 아픈 말들로 서로에게 상처를 낼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등이라도 대고 자야 안정을 느끼고, 매일 아침 눈꼽 낀 얼굴을 부벼대며 깔깔 댈 수 있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단 한 사람이 내 옆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아무것도 아닌 일상들이 이끄는 우리의 동행이 내 삶에 얼마나 환한 빛을 내렸는지를 생각하면, 나는 이것이 늘 기적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