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피하고만 현실이 꿈 속에서 반복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소리를 지르거나 손발을 차면서 잠에서 깬다. 시끄러웠던 꿈 속에 비해 주변은 너무나 고요하다. 아픈 현실을 어찌할 줄 모른 채 두고 온 자신에 대한 자책인지, 그 현실을 견디고 있을 사람들에 대한 걱정인지. 꿈 속에서 깨어난 어느 검은 새벽, 잠시 침대에 걸터 앉아 이따금 찾아오는 꿈에 대한 답을 생각했다. 수렁같은 밤은 참 괴롭다. 그러나 다시 자고 일어나 없던 일처럼 꿈을 잊는 나는 어쩌면 그 답을 알고 싶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외면이 습관이 되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초연해질 수 있는 걸까.
나는 싸움이 싫다. 그 속에서 내가 얼마나 상처받고 상처를 가했는지에 대해 도저히 논할 수 없는 이유다. 그 검은 시간들이 일종의 뿌리가 되어 나의 일부가 되었음을 안다. 사람에게는 죽어도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약점이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내게는 드럴 낼 수 없는 환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약점을 들킬 것 같은 생각이 들면 나는 더 악한 말을 내뱉기도 한다. '아 정말 엉망진창이군요, 그 어떤 짓을 해도 지금은 나아지지 않을 겁니다." 라고 스스로에게 쏘아 부치는 것이다. 악한 말의 대상은 상대가 아니라 내 자신이다. 나는 항상 최악의 결과를 유념치 않으면 더욱 힘들어 질 수 있음을 유념한다.
싸움은 과정이 아니라 빠져나올 수 없는 진창이었다. 그 어떤 말이나 호소도 모두의 상처를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나의 싸움은 그 다음 다툼의 꼬리가 되어 물고 늘어진다. 물리적인 거리를 방패 삼아 도망치고 또 도망치는 것이 나를 구원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어린 날의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아프지 않았으면 했던 나의 간절함은 그들의 분노와 원망 앞에서 내세울 게 없었다. 처음부터 헛된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그저 그렇게 각자의 현실을 받아들인 지금, 그 희망의 헛됨 또한 그냥 그렇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극복이라면 조금의 위로가 될까. 나는 잘 모르겠다.
가장 괴로운 점은 이런 나로 인해 또 다른 누군가가 상처받을 일이다. 행복이 온전하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따금 찾아오는 아픈 꿈은 다시 내 발목을 잡는다. 마치 나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처럼. 검은 새벽은 도망치고 모른 체한 숱한 날들에 대한 대가인마냥 언제 다시 나를 찾아 올지 모른다. 꿈에서 깬 고요한 주변이 너무 생경한 것처럼 나는 영원히 불안해하며 행복에 정박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퍼져오른다. 그럼에도 다시 자고 일어나면 말끔해지기를. 꿈을 막을 순 없어도 깨어 있는 순간엔 마음껏 행복하기를. 내 인생만큼은 헛된 바람이 아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