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지음, 2015
할 일은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에 대한 솔루션을 하나하나 실용적으로 찾아가며 앞서가는 나라들의 장점이나 경험을 부분적으로 참고하는 것이다. 도그마에 빠지지 말고, 유토피아적 환상을 경계하며, 더디더라도 분명히 내일은 오늘보다 낫게 만들 수 있다는 담대한 낙관주의를 가지고서 말이다.
노력이라도 해보려는 남을 냉소함으로써 그것도 하지 않는 비루한 자신을 위로한다.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는데 쇼일 뿐이라며. 진짜 용감한 자는 자기 한계 안에서 현상이라도 일부 바꾸기 위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이다.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사고는 복잡다단하다만 목표와 지향은 심플한 편이다. 졸업 전 '나는 이 일을 하고 싶다' 생각했고, 필요한 노력을 했고, 공채에 합격해 4년 남짓 밥벌이하며 살고 있다. 이상은 단순하지만 명료했다. 내가 무언가를 판다면 적어도 열렬한 취미인 책이어야 했다. 사회인으로서 발을 들여놓고 싶은 조건은 딱 그 한 가지였다. 그러니까 문제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비롯된 자아실현의 꿈. 대부분이 그렇듯 조직에 몸담는 동안 실현은 커녕, 자존이 바스라지고 우스워지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발버둥쳤다. 회사를 옮기면 나아질까, 취미에 빠지면 만족할 수 있을까, 이도 저도 아님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할까. 그렇게 작년 365일 매 순간을 고민했고, 나아질 법할 갖가지 행동령들을 실행했다. 그래서 결론은, 간절했던 이직에 결국 실패했고, 열 번에 가까운 여행과 경험들은 그저 순간의 환기를 도왔을 뿐이며, 기댈 수 없어 늘 솔직하지 못했던 연애도 수순대로 끝이 났다. 길고 긴 겨울 동안, 도리가 없어 참다가도 잠에서 깰 때면 막을 새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 쪽에든 다시 마음을 굳혀야만 했다. 환경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명제라면 냉소로서 포기하는 건 쉬운 일이다. 주어진 일만 무리없이 해내고 딱히 내일을 기대하지 않으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곧 죽어도 그게 안되는 거다. 나는 애초부터 안될 놈이었다는 걸 인정한 지금, 냉소와 열정 사이 그 어느 즈음에 내가 서 있다. 나로부터 사라진 것들이 유독 많았고 아직도 상실될 것들이 남아있는 지금. 그렇게 하나하나 인정하고 감당하다 보니 오히려 마음은 도화지가 되더라. 그렇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나로부터 내 자신을 잃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희망은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깜부기불일까. 아무래도 그럴 거다. 그래도 난 내일 아침이 되면, 깜부기불은 적어도 살아있다고, 희미한 빛에 기대 자신을 속여서라도 최대한 이 시간을 충실히 보내기로 한다. 새로이 그릴 것들을 상상하고 오늘의 성실을 다짐하며 매일의 시간을 이어보고자 한다. 이젠 세상 이치엔 불가능한 것이 있기 마련임을 인정한다. 그저 적어도 퇴보하지 않기. 온통 냉소로 가득차 세상 모든 것에 삐대는 것은 명백히 퇴보에 불과하다. 내게 있어 개인적인 의미로서의 '담대한 낙관주의'란 바로 이것. 어떻게든 밥벌이의 주역으로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면, 나는 부정보단 긍정을 택하련다. 원대한 것을 열망하지 않더라도, 담담하고 소소한 긍정으로도 삶은 얼마든지 전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