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슈켄트를 스쳐 부하라로
# 비행
한참을 곤히 자던 내 앞의 현지인 남성이 갑자기 창을 열어 밖을 바라본다. 무언가 있다는 직감에 나도 창을 연다. 켜켜이 쌓인 구름띠 사이로 설산이 보인다. 구름과 엉키고 풀어지며 절경을 만드는 설산을 오래도록 내려다본다. 비행기에서가 아니라면 설산의 지붕을, 아마도 눈이 녹아 흘러내리며 만들어냈을 듯한 우아한 곡선의 물길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비행기 값은 이걸로 다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설산은 정말 아무 손길을 타지 않은 것처럼 무구하고 오묘하다. 인간이 굳이 정복하지 않은 순수한 자연이 오롯이 하늘 아래 있다.
# 공항
낯선 공항에서의 택시는 언제나 기가 빨린다. 작은 국제공항에는 아직 시내와 대중교통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 택시가 필수다. 태국은 공항-시내 택시에 고정요금제를 도입했다. 공항에서 아직 현지 물가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이 기사와 실랑이를 하거나 바가지를 쓰면 나라의 첫인상이 나빠지기 때문일 거다. 관광대국다운 정책이다. 막 비행기에서 내린 거의 유일한 외국인은 택시기사들의 주목을 끈다. 여러 방해에도 불구하고 더듬거리며 택시 앱을 탐색하고 있는데 뒤에서 지켜보던 넉살 좋은 기사님이 앱과 같은 가격으로 가자며 쾌활하게 말한다. 그럼 뭐 오케이, 하고 따라가 택시에 탄다. 영수증을 미리 써준다던 기사님은 아까 내가 본 금액에 0을 하나 더 붙인다. 액면가가 큰 우즈벡 돈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을 향한 전형적인 수법이겠지. 영수증 좀 다시 보여줘, 왜 0이 하나 더 있어?라고 묻자 앱에서 나오는 비용은 출발 비용이고 미터 당 돈이 올라가는 구조라고 한다. 아닐 거 같은데, 미안한데 그럼 앱으로 택시 불러서 갈께. 미안해야 할 건 그인 것 같은데 미안하다는 말은 되려 내 입에서 나온다. 나쁜 첫인상만 남은 타슈켄트를 버려두고 부하라로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한다. 타슈켄트와 오해가 있다면 우즈벡 여정의 마지막이나 되어야 풀 수 있을 거다.
# 타슈켄트 남역
기차역은 꽤나 단출하다. 하나밖에 없는 스낵바에서는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음식을 서빙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2000원도 안 하는 가격에 저녁을 때우고 그보다 배가 넘는 돈을 주고 감자칩과 물을 산다. 어떤 나라에서는 공산품이 노동력보다 비싸다는 것을 실감한다. 우즈벡 사람들은 미소를 잘 보여주진 않지만 군더더기 없이 친절한 느낌이다. 여기서 밤기차를 기다리는 사람 중 외국인은 나 혼자인 것 같지만 편안하다. 낯섬이나 타국에 혼자인 느낌이 나를 위협했던 적은 별로 없다. 어차피 이들은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
# 야간열차 1
열차의 침대칸 컴파트먼트는 생각보다 작아서 웃음이 났다. 작은 공간에 위/아래 침대 4개를 구겨 넣어, 사이드미러마냥 옆사람과의 거리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웠다. 심지어 윗 침대는 계단이랄 게 없어 오르내리기 위해서는 아랫칸 침대에 발을 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층의 키 큰 그가 내 침대를 밟고 삐걱거리며 오르내릴 때마다 그저 그가 미끄러지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공간의 효율성이 인간적 연대를 낳는 순간이다. 기차의 화장실은 출발해야만 열어준다. 자기 전에 양치를 하려고 잠긴 화장실 문을 절망스럽게 흔들고 있었는데, 기차 출발 후 직원분이 열쇠로 문을 열어주셨다. (아주 드물게 있는 일이지만) 술에 잔뜩 취해도 반드시 이는 닦고 자는 걸로 봐서 내가 양치에 집착이 좀 있나 보다.
# 야간열차 2
간단한 소통만 가능했음에도 시종일관 친절한 옆 침대의 여인이 내가 부하라 역에서 못 내릴까 봐 새벽부터 깨워줬다. 그녀를 따라서 시트와 이불을 개고 있는데, 혼자 여행?이라고 묻는다. 자주 듣는 질문이지만 주로 여자들이 묻는다. 그렇다고 밝게 대답해도 어김없이 걱정이 그녀들의 얼굴을 스친다. 당연히 자신의 경험치 밖에 있는 일들은 어렵거나 위험해 보일 거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상사가 그렇듯 막상 해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혼자여행도 그렇다. 오롯이 한 면만 있는 것이 없듯 역시 장단이 있다. 자유가 있지만 책임도 혼자다. 망해도 서로를 비난하며 같이 웃을 사람이 없는 게 단점이지만 망해도 혼자 망한다는 게 장점이다. 뭐 그런 거다.
# 부하라역
온전히 깨지 않은 채 기차에서 내린다. 아침 공기가 왜 이리 추운 건지 날씨앱을 켰다가 이상한 지명에 정신이 든다. 분명 내리기 전에 확인했음에도 역무원에게 부하라가 맞냐고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걸음을 뗀다. 구글맵이 먹통인가, 기차역이 시내에서 이렇게 먼 게 맞나, 대중교통은 있나, 머릿속이 느리게 로딩 중이다. 대중교통의 힌트를 얻으려면 현지인들을 따라갔어야 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땐 그들은 이미 갈길을 갔고 나만 택시기사들의 먹잇감으로 던져진다. 그들은 똑같은 논리를 펼치며 따라붙는다. 선생님, 그 수법은 이미 공항에서 당했어요. 유행 지났다구요. 기차로 부하라에 왔다는 건 타슈켄트 공항을 거쳐왔다는 건데 같은 수법을 쓰는 건 참신함에서 감점이다. 사기에도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 택시
우즈벡 국민앱 얀덱스고로 잡은 택시 기사님들은 믿음직하다. 택시에 타자 기사님이 카리예 니키타예라고 들리는 말을 하신다. 뭔지 몰라도 국적이 궁금하시구나. 한국인이요, 대답한다. 활짝 웃으시며 너네는 참 구별 못하겠다니까, 하는 느낌의 말과 함께 손을 휘저으신다. 나도 따라 웃는다. 저도 중앙아시안은커녕 동아시안도 구별 못해요,라고 속으로 대답한다. 이전에 이탈리아 기차에서 우연히 - 아마도 우연만은 아니고 유럽의 치안을 불신하는 아시아인들이 짐칸 근처 좌석을 선호한 탓일 게다- 3쌍의 아시안들이 주변에 앉았고 마음속으로 국적을 추측했었다. 그러나 모든 추측이 틀렸고 내 편견의 민낯을 불편하게 마주해야 했다. 그러니 나의 웃음은 진짜 공감의 웃음이다.
# 숙소
3% 배터리의 핸드폰으로 겨우 숙소에 당도했다. 오는 내내 마치 내 수명이 깎이듯 조마조마했다. 폰이 꺼졌을 때 숙소를 찾는 시뮬레이션을 머리에서 돌려보았다. 사실 불가능할 것도 없는데 현대인은 폰이 없는 상상만으로도 공포에 먼저 질린다. 상냥한 호스트분은 청소 안 된 내 방을 미리 보기로 보여준다. 방에서 편하게 화장실도 쓰고 충전도 하라고 허락해 주신다. 아침을 먹을 거냐고 물으시니, 이 정도 친절이면 아침을 먹고 왔어도 또 먹어야 인지상정이다. 잘 차려진 아침을 음미하고 마지막 입가심으로 요거트 같은 것을 한 수저 퍼먹으니 앗, 녹인 마시멜로우다. 단 것에 취약한 나는 정신이 번쩍 든다. 홍차보다 강력하다. 무엇이랑 같이 먹는 건지 혹은 전통적인 디저트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모르는 게 많다니 즐겁다. 마시멜로우는 우즈벡 문화냐고 AI에게 물어보니 그냥 구소련권 문화에서 창조한 ‘대충 달달한 거 만들기’ 문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AI 답지 않게 꽤나 신랄하게 말하는 걸 보니 미국의 코드라 무의식적으로 구소련에 대한 반감이 반영된 걸까 싶어 우습다. 숙소에서 좀 더 비벼볼라는데 이제 그만 꺼지라는 듯이 전기가 나간다.
# 야경
오늘날이 맑으니 야경을 봐야 하나 하고 굳이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돔형 천장 밑에서 우즈벡 여인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마도 아주 오래되었을 돌에 부딪혀 울리는 그녀 목소리가 무척 아름답다. 서서 듣고 싶지만 방해가 될까 걸음만 늦춰서 지나친다. 의무적으로 셔터를 누르고 온 조명 켜진 모스크보다 인상 깊은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