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수록 깊이와 무게를 헤아리기 힘든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앞으로도 여러 번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매번 더 좋아하겠지.
<드라이브 마이 카> 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단편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 에 수록된 두 편, '드라이브 마이 카'와 '세에라자드' 가 섞여 있다.
그리고 줄곧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가 동행한다.
처음에 영화를 봤을 땐 하루키 소설은 읽었지만 기억이 안났고, 바냐 아저씨는 읽기 전이었다.
그 땐 가후쿠와 오토, 미사키만 보였다.
하루키 소설을 다시 읽고 영화를 봤을 땐, 칠성 장어와 다카츠키도 보였다.
<바냐 아저씨> 까지 읽고 세 번째 보니, 많은 것들이 보인다.
섹스할 때마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오토는
영화에서 소설 '세에라자드' 속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이 곧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로 죽음을 피하는 여자 '세에라자드' 이기도 하다.
배신감, 상처, 상실, 원망, 후회.. 그리고 일을 통해 삶을 지탱해 나가는 것은
영화의 흐름이면서 동시에 '바냐 아저씨'의 내용이기도 하다.
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는 차(빨간색 사브)에서 늘 아내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된 '바냐 아저씨' 대본을 듣는다. 오토가 바람 피운 걸 알지만 두려워서 모른체 할 때, 마침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 여자의 정숙함이 철두철미하게 거짓이니까. 미사여구만 가득하고 논리는 없어.
나의 인생은 글렀다. 돌이킬 수 없다.. 내 인생과 사랑을 어떻게 하면 좋지?"
사이가 좋았는데 왜 다른 남자가 필요했는지, 진실을 알 기회도 없이 갑자기 아내가 지주막하출혈로 죽었다. 가후쿠가 힘든 일상을 보낼 때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내 생각엔 진실이 라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그렇게 두렵지 않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이다."
2년 후 가후쿠는 연극제를 위해 두 달 간 히로시마에 체류하게 된다.
그리하여 연극제에서 제공해 준 운전사 미사키와의 (상처를 드러내고 보듬는) 여정이 시작된다.
가후쿠의 아내 오토와 바람을 피웠던 타카츠키도 오디션을 보러와 바냐 역을 맡게 됐다.
'바냐 아저씨'의 출연진은 일본, 홍콩, 대만, 한국 등의 다국적 배우들로
각자 자신의 언어로 연기하지만 연습을 통해 상대의 배역을 이해하며 연극을 만들어 간다.
(소냐 역의 배우는 수어로 연기를 한다.)
상처나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 일을 통해 한 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역할을 하며, 세상은 지속된다.
최근 들은 체호프 강의에서 선생님도 이 영화를 얘기하셨다.
영화에서 '바냐 아저씨' 연극만 보였다고. ㅎ
나도 세 번째 볼 때는 드디어 영화 속 '바냐 아저씨'를 즐기며 볼 수 있었다.
가후쿠는 이런 말도 한다.
"체호프는 두려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히로시마에서 홋카이도까지, 눈으로 덮힌 미사키의 고향에서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미사키가 가후쿠에게 말한다.
" 가후쿠 씨는 오토씨의 모든 걸 진짜로 받아들이는 게 어려운가요? 오토씨에겐 수수께끼가 없었잖아요.
그냥 그런 사람이라 생각하는게 어려운가요. 가후쿠씨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도, 다른 남자를 끝없이 갈망한 것도 어떤 거짓과 모순도 없는 것 같은데요."
가후쿠는 답한다.
"나는 제대로 상처 받았어야 했어. 진실을 지나치고 말았어. 실은 깊은 상처를 받았지. 곧 미쳐 버릴 정도로.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계속 못 본 척했어.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일 수 없었어. 그래서 난 오토를 잃은 거야. 영원히.."
그들이 서로를 끌어 안고 나누는 마지막 대화도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과 겹친다.
"살아 남은 자는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해. 어떤 형태로든 그게 계속되지.
나와 너는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어. 살아가야 해. 괜찮아.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영화의 문장들이 무겁다.
수수께끼가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을 갈망하는 사람을 나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진실을 마주하고, 제대로 상처받을 용기가 나에게는 있을까.
그 용기가 없어서 잃어버린 사람이 내겐 없을까.
처음엔 비호감이었던 다카츠키 캐릭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드러낼 수 없는 관계였지만 오토의 죽음은 그에게도 큰 상실이었다.
미안함과 함께, 20년간 오토와 살았던 그녀의 남편 가후쿠를 부러워한다.
자신의 표현대로 텅 비어버렸다. 슬픔과 분노로 거칠게 살고 있다.
오토가 들려준 이야기라며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할 때는 섬짓하며 자책 같이 들렸다.
오토의 죽음으로 가후쿠도 다카츠키도, 불확실한 세계에 살게 됐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다카츠키가 때린 사람이 죽었다며 찾아온 경찰에게 순순히 자백하며 '제가 했습니다. 틀림 없습니다.' 할 때 슬펐다.
영화를 처음 볼 땐 보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부분이다.
사랑한다는 건 어떤 것인지
이미 벌어진 절망과 상실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진실을 마주하고 받아들일 순 없는지,
하루키와 체호프를 이렇게 절묘하게 엮어낸 하마구치 류스케
세상에 천재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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