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한란〉 리뷰|과거로의 전진

〈한란〉 (감독 하명미)

by 인디즈


가끔은 세상이 너무 빠르다. 미래라 생각했던 것들이 눈 깜짝할 새 현실이 되어 있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 체 시간만이 흐른다. 그런 우리를 위해 잠시 뒤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가 있다.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던 분실물을 손에 쥐여주는 영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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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란〉은 1948년 제주 4·3 사건의 기록을 2025년의 우리에게 내민다. 제주 해녀 ‘아진’과 어린 딸 ‘해생’의 여정을 중심으로 재구성된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우리를 붙든다.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다른 영화들을 생각했을 때, 〈한란〉은 유독 설명적 요소를 덜고 희생자 개개인을 진득이 비춘다. 역사책보다는 누군가의 일기를 그려낸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작품의 평가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나는 감독의 선택을 이해한다.


그때 그곳의 고통을 지금 여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큰 사건보다 작은 개인에 집중하는 방법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영화가 아진-해생 모녀와 주변인들을 지겨울 만큼 따라다닌 건, 영화를 거대한 서사가 아닌 우리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가 아닐까. 특히나 바삐 흐르는 시간을 잠시 멈추고 객석에 앉기로 한 관객을 빠르게 공감시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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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택 덕에 우리는 아진-해생의 이야기가 1948년의 제주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비극임을 쉽게 느끼게 된다. 아진-해생의 공포와 무력감은 작년 12월의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느껴본 종류의 고통이지 않은가. 이런 영화가 여전히 필요한 건 그래서다. 과거의 비극은 늘 다른 얼굴로 우리를 찾아온다. 앞만 보는 자에겐 그 얼굴을 알아보는 능력이 없다.


국가 차원의 폭력을 멈춰 세운 건 언제나 과거의 흉터를 기억해 오늘의 상처를 재빠르게 봉합해 낸 이들이었다. 때로 트라우마는 좋은 위험 감지 센서가 되기도 하니까. 어둠을 기억하는 자는 또다른 어둠이 와도 출구를 찾을 수 있다. 어둠을 지나온 우리는 그 전과는 다르다. 동굴에 숨어 있기보다 터널을 통과한 덕에 아진-해생은 바다를 만난다. 비록 그들의 여정은 총성에 가로막혔지만 그 기억을 이어받은 영화가 있다. 2시간 동안만이라도 그때를 다시 되새기기로 마음먹은 관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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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흩어져도 글은 오래오래 남는다”는 아진 대사를 완성하는 건 남겨진 우리의 몫이다. 그때의 사람들과 오늘의 영화는 기록을 남겼다. 그 어둠의 흔적을 매 순간 기억하고 살 순 없어도, 과거에 두고 오지만 말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모두가 함께 뒤를 돌아보면 그것은 전진이 된다. 영화를 보고 난 우리의 고개는 앞만 바라보던 이전과는 분명 다른 곳을 향해 있을 것이다. 좋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또 한 번 뒤돌아본다.





인디즈의 독립영화 리뷰

# 강신정 tlswwjd1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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