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순이, 이게 내 이름이다.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하얀 용 한 마리가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처럼 엄마 품으로 파고드는 신기한 태몽을 꾸었단다. 장래에 크게 되어 가난한 집을 일으켜 세울 아들이태어나겠구나 했는데, 막상 낳아보니 딸이었다.
실망해서 당혹스러워했을 아빠, 엄마의 얼굴이 상상된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딸로 태어난 건 쓸데없이 먹여 살릴 입만 늘어난 셈.한마디로 난 태어나자마자 환영받지 못한 자식이었다.
돈 버는 능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아빠와 함께 사는 엄마의 삶은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봐도 한심하고 불쌍하다.일단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부엌으로 가서 하는 일은 어제 밤늦게까지 껍질을 까서 불려놓은, 칡 나무뿌리를 삶는 일이다.
부부 내외, 나, 나머지 11명의 남매들까지 총 14명을 먹이려면 새벽 댓바람부터 동네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아궁이를 때기 시작한다. 큰 솥에다 칡뿌리와 함께 산에 가서캐논 나물 몇 가지를 푹 삶아낸다.이 일을 엄마 혼자서 하긴 힘드니 큰 언니, 작은 언니, 나 셋이서 엄마를 돕는다. 참고로 큰 언니는 살림밑천 첫째 장녀, 그 밑에 오빠 둘째, 작은 언니가 셋째, 그리고 또 오빠 넷째, 나 다섯째, 나 아래로 줄줄이 6명 남녀혼성 동생들이있다. 심지어 제일 막내는 2살 갓난아기이다. 요즘 이 아이도 이유식을 시작할 나이인데 멀건 죽 한 모금도 입에 대기 힘든 형편이라 빼빼 말라비틀어지기 일보직전이다.
먹을 게 항상 부족해서 다들 뼈와 살거죽이 착 붙어있어 불쌍한 몰골이 말도 다 못 할 지경이다.그나마 칡뿌리와 나물 삶은 데다가 어디서 얻은 콩이라도 좀 넣어 끓여 먹는 날은 잔치하는 날이라 해도 무방하다.
- 어무니, 여기 좀 나와보셔여! 아버지께서 저녁 찬거리를 잡아왔나봐여.
그날도 난 아랫마을 사는 부잣집 마님에게서 얻은 삯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아참, 내 나이를 밝히지 않았구나. 나는 올해 12살이다. 벌써부터 무슨 바느질을 하느냐 하겠지만 그나마 여자들이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감 중 하나다. 어머니는 일찌감치 언니 둘과 나에게 바느질하는 법을 특별히, 교육시켰다. 손가락이 뾰족한 바늘 끝에 찔려 숭숭 구멍이 나고 피가 나도 부지런히 약속한 시간에 맞춰 일감을 끝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일거리를 받아올 수 있고 받은 품삯으로 멀건 보리죽이라도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