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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니쉬 걸(The Danish Girl)

"내가 누군지 모른 채 살아갈 순 없어요."

by IndigoB

일부 내용이 스포일러로 노출될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영화 대니쉬 걸은 2015년에 개봉한 영화로, 덴마크의 유명한 풍경 화가인 에이나르 베그너와 그의 아내 게르다 베그너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The Danish Girl은 덴마크 여자라는 뜻이다.

성전환 전 에이나르 베그너(좌), 여성 '릴리 엘베'로 전환한 모습(우)

에이나르 베그너는 풍경화가로 일찍이 명성을 떨치며 역시 화가였던 아내 게르다와 함께 꽤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어느 날, 게르다요청으로 그림 모델이 되어 장난스럽게 치맛단을 걸치고 여성스럽고 요염한 자세를 취한다. 그러자 불현듯 자신의 내면에 꽁꽁 숨겨왔던 여성성을 깨우게 되고, 이때 탄생한 가상의 인물이 '릴리 엘베'이다. 처음엔 장난처럼 여자 옷을 착장하고 아내의 모델로 나섰지만, 에이나르는 이 신선한 경험을 통해 깊은 감동과 충격을 받게 되고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예술가들이 참석하는 파티에 아내와 함께 여장을 하고 에이나르의 사촌 여동생 '릴리'로 자청하고 나타나면서 많은 사람들, 특히 남성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러다 '릴리'에게 꽤 적극적으로 다가와 말을 걸고 호감을 보이는 예술가를 만난다. 에이나르는 자신이 만든 인물 '릴리'에 대한 예술가의 관심과 호감이 마냥 싫지 않고, 되려 내심 즐기기까지 한다.


에이나르는 아내 게르다 몰래 그 남자와 은밀한 만남을 이어간다. 그러나 에이나르는 예술가가 사실은 동성애자였고, 자신을 온전한 여성이 아닌, 같은 동성애자로 대하며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적극적으로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남자를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온 에이나르는 또 다른 성정체성 혼란에 빠진다. 마침내 본래 남성(男性)의 몸으로 타고난 '에이나르'라는 존재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기에 이른다.


아내 게르다는 곁에서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호기심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낀다. 평소 섬세하고 자상했었던 남편을 점점 잃어고 있다는 두려움, 그가 자신을 떠날 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함에도 게르다가 봐도 놀라울 정도로 여성스럽고 우아한 '릴리'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그(그녀)를 자신의 캔버스에 그려보고 싶은 충동과 예술적 영감에 빠지게 된다.

내면의 성(性) '릴리'를 일깨우는 에이나르


그렇게 예술적 영감에 끌려 릴리를 그린 그림 몇 점을 들고 가 예술품 중개인에게 선보인다. 게르다가 들고 온 그림을 한눈에 보자마자 매료된 중개인은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자는 제안을 하게 되는데...


뜻밖의 호응에 기쁘고 얼떨떨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게르다는 중개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에이나르에게 함께 파리에 갈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에이나르는 더 이상 남성 복장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기를 거부한다. 처음으로 화가로서 인정받고 명성을 떨칠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게르다. 파리행을 극구 거부하는 남편을 향해 절박함을 눈물로 호소한다. 게르다는 사실 자신이 파리에 가 있는 동안 집에 콕 처박혀 은둔한 채 그림조차도 그리지도 않고, 폐인처럼 살고 있을 남편이 걱정되어 같이 가자고 한 것이었다. 그런 게르다의 마음을 알고 죄책감을 느끼게 된 에이나르는 결국 함께 파리행을 결정하게 된다.


파리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기 전, 게르다는 수소문 끝에 에이나르가 어릴 적 고향에서 절친으로 같이 자랐던 친구이자 현재 파리에서 명화 중개인으로 활동하는 '막스'를 찾아가 에이나르의 상황을 설명하고 도와달라 부탁한다. 게르다가 막스를 찾아갔었다는 얘길 전해 들은 에이나르. 어린 시절 남몰래 사랑앓이 했던 첫사랑, 막스의 이름만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달떠서 심장이 요동친다.


며칠 뒤 게르다가 처음 만난 막스를 데리고 에이나르와 묵고 있는 호텔로 돌아오는데, 풀 메이크업을 하고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한껏 치장한 '릴리'가 다소곳이 소파에 앉아 게르다와 막스를 맞는다.


몇십 년 만에 재회한 에이나르의 이질적 외모와 차림새에 경악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막스에게 에이나르는 자신을 '릴리'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 막스와 함께 자주 보곤 했던 고향의 목가적 풍경과 당시의 느낌, 막스와 안타깝게 헤어졌던 기억 등떠올리며 이야기한다.

내면에 감추고 있던 '릴리'를 막스에게 소개한 에이나르


막스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 '에이나르'가 몰라보게 변모한 모습에 애써 당황함을 감추고 '친구를 아끼는 우정'으로 릴리를 진지하게 대하며 추억을 상기하며 기꺼이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 예전에 자신이 아끼고 좋아했던 친구 '에이나르'가 조금 독특하고 신비한 친구였다고 말한다. 앞치마를 걸쳐 입은 에이나르에게 자신도 모르게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묘하게 느꼈었고, 키스하려고 하는 순간 에이나르 아버지에게 들켜서 맞아 죽을 뻔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이후로 친구 에이나르를 만날 수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을 떠나게 되어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는 얘기. 그리고 여태껏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막스의 얘기를 듣다가 결국 애써 눌러왔던 감정을 주체 못 하는 에이나르, 아니 '릴리'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며 자리를 떠나 서둘러 방으로 뛰쳐 들어간다.


이 장면에서 나름 추측해 보면, 에이나르는 엄한 가부장이었던 아버지로 인해 남성다움을 강요받고 살아왔을 것이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게르다를 만나 결혼하면서 평범한 남성으로 적응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내면 깊숙한 곳에 진정으로 욕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꽁꽁 봉인하고 억지로 외면해 오면서, 어린 시절 사랑한 친구 막스와의 추억이 담긴 고향 풍경을 화폭에 담으며 스스로를 달래며 살았을 것이다. 또한 에이나르가 숱한 세월 깊고 어둡고 애잔한 슬픔을 품고 살아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막스는 이런 친구와 그의 아내, 게르다에 대해서 진심으로 동정심을 느낀다. 어쩌면 스스로 소년 시절 친구 에이나르를 순수하게 사랑했었던 자신을 뒤늦게 깨달았는 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여러 형태로, 여러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기에 그 마음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 태어났을 때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사랑했고, 성적인 성숙함을 알기 전까지 동성이든 이성이든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춘기를 겪으면서 이성을 원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으로 자연스레 변한다. 하지만 그중에서 간혹 소수의 사람이 동성을 원하는 성 지향성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성 지향성은 생각처럼 쉽게 수정, 변경될 수 있는게 아니라 어쩌면 평생 지니고 사는 숙명과 같을 것이다.


영화 대니쉬 걸의 실제 주인공 에이나르 베그너동성애 등 성 지향성과는 별개로, 또 다른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에이나르는 성전환이 필요한 사람이다. 신체는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정신과 뇌가 여성으로 태어난 성전환증을 앓는 환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신체의 성을 따를 수 없어서 죽음을 각오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성 정체성을 되찾고자 하는 갈망을 느낀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원하지 않는 성으로 태어난 자신에 대해 자기혐오와 좌절감에 빠져 매번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힐 수 있다.


아직까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성의식에 비롯된 사회통념, 선입견, 남성과 여성에게 부여되고 강요되는 성역할, 다양성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사회 규범과 제도, 규칙과 법 등 아직 넘지 못하는 벽과 차별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이해받기 힘든 성 소수자 중에서도 또 다른 고통과 차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성전환자, Trancegender라고 볼 수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주인공 에이나르는 이런 자신의 마음이 '정신병'이라 생각하고 치료를 받고자 병원을 방문한다. 당시에 생식기에 방사능을 쬐어 치료하는, 지금 현대의학으로 볼 때 정말 말도 안 되는 치료받는다. 또 정신치료를 목적으로 투여받는 약 때문에 오히려 심신이 피폐해진다. 아내 게르다 또한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 괴롭기만 했다. 결국 이 모든 치료와 노력이 헛수고이며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 판단하고 치료를 포기한다.



정신병원에서 나와 파리에 있을 동안 꾸준히 관련 치료법과 병원을 수소문해 본 결과, 에이나르와 같은 환자를 연구하고 성전환 수술로 치료하는 병원과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이전에도 같은 증상을 앓는 환자가 찾아와서 성전환 수술을 하기로 했었는데, 꽤 까다롭고 워낙 위험한 수술이어서 그런지 그 환자가 무섭고 두려워 결국 수술을 포기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만약 에이나르가 수술을 받게 된다면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시도하는 사례가 될 것이고 당장 성공을 백 퍼센트 보장할 수 없으므로 본인 스스로 생각해 보고 결정하기를 권유한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상태로 평생 고통받고 사느니 죽음을 각오하고 성전환수술을 받기로 결심한 에이나르. 에이나르는 어쩌면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큰 수술을 앞두게 된다. 이제는 많이 어색해진 남성 슈트를 갖춰 입고 병원을 향하는 기차에 홀로 탄다. 남편이 너무 걱정되어 함께 가기를 청하는 아내 게르다에게 '내가 어떻게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살았을까. 게르다, 이제 다시는 당신의 에이나르를 만날 수 없을 거야. 에이나르는 이제 잊고 당신도 당신의 삶을 살고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긴다. 더 이상 에이나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 태어날 '릴리 엘베'만이 있을 예정이므로, 게르다 곁에는 이미 자신을 대신해 동반자가 되어 함께 있어줄 사람, 막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대니쉬 걸은 주인공 '에이나르'도 대단하지만 아내 게르다가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평생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하고 결혼한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여성이 되겠다고 하면 어느 아내가 이해해 주고 지지해 줄까. 자신을 향한 사랑과 믿음, 신뢰가 한순간 무너진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게르다는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거부당하는 듯한 자신의 존재와 배신감, 슬픔, 외로움을 감수하고 에이나르 옆을 지키고 지지한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수술을 위해 홀로 기차에 오르는 남편을 바라보는 게르다의 시선이 너무 애잔하고 슬프다. 위험한 수술을 받겠다고 떠나는 남편의 모습이, 어쩌면 저 모습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텐데 참으로 슬프다.

주인공 '에이나르'를 클로즈업한 영화 포스터

영화를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에디 레드메인'것이라 생각한다. 이 남자 배우는 원래 얼굴 생김이 묘하게 개성이 강했고, 수줍어하는 말투, 제스처가 시선을 끄는 배우이고, 샤이가이(shy guy)로서 매력이 있다.

아내 역할 '알리시아 비칸데르', 막스 역할 '마티아스 스후나르츠' 또한 연기가 좋았다. 특히 막스 역할을 한 남자 배우는 이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듬직하고 믿음직한 캐릭터가 잘 어울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조연으로 '벤 위쇼'는 이미 국내에서는 영화 '향수'를 통해 유명해진 배우이다.


영화 대니쉬 걸을 보지 못한 분에게는 나의 글이 어쩌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미리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그런데 내용을 안다 해서 그 영화에 대해 다 안다 할 수 없을 것이며, 간혹 다시 봐도 괜찮은 작품이라 감히 권유하는 바다.


그럼, 리뷰를 통해 이 작품을 보기로 결정하신 독자에게 진심으로 즐거운 관람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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