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흑룡(黑龍)

(흥부 시점)

by IndigoB

이틀이 지났다. 여전히 용순이는 눈을 뜨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내 손끝에 닿는 아이의 손등은 더 이상 사람의 살결이 아니었다. 차갑고 딱딱해 보이는 하얀 비늘무늬가 여린 팔뚝을 타고 징그럽게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한때 복숭아처럼 발그레했던 뺨은 이제 핏기가 가신 채 옅고 푸르스름한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냘픈 실바람 같았다.


방 안에는 어쩌면 죽음보다 더 무거울 듯한 침묵만이 괴괴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내는 이미 넋을 잃은 얼굴로 아이의 발치에 앉아 흐느끼고 있었고, 문밖에서는 맏딸부터 막내아들까지 올망졸망한 자식들이 서로 옷소매를 붙잡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방 안에서 풍겨 나오는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서늘하고 비릿한 냄새가, 자신들의 누이를 데려가려는 저승의 그림자라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


- 이게 다 못난 내 죄여. 아버님 유언을 제대로 받들지 못 허고, 형이 탐욕을 부려 그런 짓을 헐지 꿈에도 몰랐던 내 탓이구먼. 흑흑.


나는 흰 비늘이 돋은 용순이의 손등 위에 고개를 푹 묻었다. 뜨거운 눈물이 비늘 사이사이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차라리 내 목숨 줄을 거둬가고 이 불쌍하고 어린것 좀 살려달라고, 마음속으로 셀 수 없이 빌면서 절규하던 그때였다.


방안을 겨우 비추던 호롱불이 파르르 떨리더니, 갑자기 기이한 보랏빛으로 변하며 길게 늘어났다. 문밖에서 불어온 돌풍에 문고리가 요란하게 덜컥거렸고, 방바닥 틈새마다 짙은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짐승의 혀처럼 용순이의 머리맡을 감싸 안았다. 아내가 놀라 비명을 지르기도 전, 안개 한가운데가 순간적으로 소용돌이치며 한 사내의 형상이 서서히 나타났다.


그는 칠흑 같은 비단 도포를 입은 청년이었다. 밤의 어둠을 깎아 만든 듯한 검은 머리카락 위로 서늘한 청린(靑鱗) 빛을 내뿜는 상투관(冠)이 빛나고 있었다. 눈매는 날 선 검처럼 날카로웠지만, 그 깊은 눈동자 속에는 인간이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유구한 세월의 고독과 슬픔이 서려 있었다. 나는 숨이 턱 막히는 위압감에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사내의 눈빛에서 묘한 익숙함을 떠올렸고, 연이어 덮쳐오는 당혹감에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와 순간 두 입을 틀어막았다.


작년 봄, 날개가 꺾인 채 내 처마 밑으로 떨어졌던 그 작고 가냘픈 제비의 눈망울.


- 당신은 혹시 그때 그 제비? 어째서 이런... 도대체 누구요?


느닷없이 나타난 젊은 사내는 대답 대신 용순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닿자 아이의 피부 아래에서 어지럽게 꿈틀거리던 하얀빛들이 일순간 잠잠해졌다.


흑룡 이무기 등장111.png



- 맞소. 나는 그대가 생명을 구해준, 그 은혜 입은 제비요. 이제야 그대의 딸을 구할 답을 들고 왔소.


그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방안 전체를 진동시키는 기이한 울림이 있었다. 그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본래 나는 천년 동안 공덕을 쌓아 승천하려던 흑룡(黑龍)이었소. 불행하게도 하늘로 올라가던 도중 뜻밖의 사고로 승천할 기회를 잃고 용수산 폭포 아래 계곡에 은신하는 이무기 신세가 되었소. 지난봄, 나는 인간 세상을 살피려 제비의 몸으로 변신해서 마을로 내려갔다가 부정한 뱀의 습격을 받았소. 그때 그대가 내 부러진 다리를 고쳐주고 처마 밑 둥지를 내어주었지.


자신을 흑룡 이무기라 소개하는 사내의 눈동자가 순간 세로로 찢어지며 황금빛 섬광을 내뿜었다. 나는 그 압도적인 정체 앞에 전율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나직하고 서글픈 어조로 속삭였다.


- 천년 동안 인간의 탐욕만을 보아왔던 내게, 아무 대가 없는 그대의 친절과 자애로움이 여의주보다 더한 무게로 다가왔소. 오직 승천 하나만을 생각하며 인간 세상에 무심했던 내가 그대와 그대의 딸에게 크게 감동하였소. 이제 내가 입은 은혜를 갚을 차례이니 그대 딸에게 깃든 백룡 이무기의 힘과 기운을 빼내고자 하오.


나는 젊은 사내가 하는 이야기를 꽤 진지하게 조용히 듣고 있다가 방금 들은 말에 놀라 내 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용순이 몸에 뭐가 들어가 있다고?


- 자, 잠깐, 우리 용순이한티 백룡 이무기라니? 시방 그게 뭔 소리오?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주시오.


그는 용순이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을 설명했다. 성소에 흑룡의 구슬이 돌아오면서 산의 맥이 다시 뛰기 시작했고, 그 진동에 용순이 몸속에 봉인되어 있던 백룡의 기운이 공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흑룡은 음(陰)이고 백룡은 양(陽)이니, 서로를 끌어당기면서도 밀어내는 이 거대한 힘과 기운을 어린 육신이 감당해 낼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 시간이 없소. 동이 트기 전, 용수산 기운이 가장 맑게 솟구치는 성소의 폭포 아래에서 의식을 치러야 하오. 그곳에서 백룡의 기운을 안전하게 분리해내지 못하면, 그대 딸의 영혼은 백룡의 빛에 휩쓸려 허공으로 흩어질 거요. 그리되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 채 몸은 빈껍데기가 되어 죽을 것이고, 나 또한 영영 승천의 기회를 잃게 되겠지. 백룡과 흑룡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야 비로소 완전한 음양의 합일로 승천이 완성되오.


나는 젊은 사내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 문득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이 닿는 자리엔 당장 죽음의 문턱을 넘을 듯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용순이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온몸이 굳은 채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그때까지 아내는 신비한 젊은 사내와 내 곁에서 도무지 믿기 힘든 그 얘길 가만히 다 듣고 있었다. 정신이 돌아온 듯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두 팔을 벌려 바닥에 엎드리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 시작했다.


- 나리, 뭐든지 하겠습니다요. 제 목숨을 가져가도 좋으니, 제발 우리 용순이 좀 살려주셔요. 나리는 영험한 힘을 지니셨으니 반드시 용순이를 살릴 수 있겄지유.


사내의 발치에 매달리듯 울먹이며 애원하는 아내를 보고 있자니 금세 내 눈앞도 희뿌얘질 것만 같아 눈두덩을 소맷자락으로 세게 비볐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젊은 사내는 다시 검은 연기로 변해 용순이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용순이를 등에 업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서늘한 냉기가 내 심장까지 얼려버릴 듯했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 아범! 거기 아범 있소?


밖에서 있던 행랑아범이 문을 열었다. 기이한 안개를 본 그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남은 자식들을 부탁하고, 행랑아범에게 성소 아래까지만 길을 터 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아내의 손을 짧게, 그러나 힘주어 쥐었다. 아내의 눈망울에 맺힌 눈물이 떨어져 내 손등을 적셨다. 그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이자 간절한 당부였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은 안개가 이끄는 어두운 산길로 몸을 던졌다. 밤의 용수산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앉아 있는 검은 괴물 같았다. 바람도 잦아든 고요한 밤에 이상하게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휘어지며 내 앞길을 막아섰고, 이름 모를 산짐승과 새들이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을 번뜩이며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 들어 섬뜩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려워할 겨를이 없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용순이의 미세한 숨소리가 점점 약해지는 것만 같아 마음이 자꾸 조급해졌다. 앞서 걷는 행랑아범이 든 횃불만이 내 유일한 나침반이었다.


그때 나와 용순이를 감싸고 있던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흑룡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내 앞을 앞질러 날아가며 길을 열었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엉킨 덩굴이 풀리고 날카로운 바위들이 평평하게 가라앉았다. 문득 흑룡이 멈춰 서서 동굴 속처럼 깊고 풍부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읊조렸다.


- 기억하시오, 흥부. 인간의 부성애는 천륜으로 때로 천년의 도력보다 강한 법이지. 의식의 순간, 그대의 믿음이 흔들리면 백룡의 기운과 힘은 갈 길을 잃을 것이오. 명심하시오!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발등이 바위에 긁혀 피가 맺히고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등을 적시는 아이의 차가운 체온이 나를 채찍질했다. 저 멀리 폭포의 웅장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설의 시작이자, 내 딸의 목숨이 결정될 최후의 장소에서 들려오는 장엄한 부름이었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폭포를 향해 나아갔다. 머리 위로 보랏빛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성소가 있는 동굴 입구를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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