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핏줄의 배반

(흥부 시점)

by IndigoB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차릴 새도 없이, 순간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또다시 펼쳐졌다. 벼랑 위 허공을 가득 메우던 백룡의 형상이 눈부신 빛기둥으로 변하더니 용순이의 상반신으로 사정없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휘이이잉!


거센 바람이 용순이의 주변을 한 바퀴 휘감더니, 마지막 남은 빛 한 조각까지 가슴팍으로 잦아들었다. 그 거대한 기운을 받아내기에 딸의 몸은 너무나 작고 가냘팠다. 빛이 완전히 갈무리되는 순간, 용순이는 짧은 신음조차 내뱉지 못한 채 그대로 고개를 떨구며 정신을 잃었다. 이내 앉은자리에서 힘없이 픽 쓰러졌다. 아내의 새된 고함 소리가 산울림처럼 사방에 울려 퍼졌다.


- 용순아! 아가, 정신 차려라, 용순아!


무서운 기세로 커다란 입에서 뜨거운 불을 내뿜던 백룡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온 천지에 울리던 포효 소리마저 사라진 자리에는 잘려나간 밧줄 조각과 칼이 어지럽게 나뒹굴었고, 복면을 쓴 사내 몇 명이 불에 그을린 채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벌벌 떨던 놀부 형이 얼굴을 들고 행랑아범을 쏘아보더니 냅다 소리를 질렀다.


- 네 이놈! 어디 천한 것 따위가 감히 제 상전을 묶고 겁박하는 게야!


결박당한 채 파들파들 떨면서도 뻔뻔하게 큰소리치는 그 모습은 내 눈에 도리어 한낱 미물보다 못해 보였다.

나는 기절해 쓰러진 용순이를 아내의 품에 조심스레 건네주고 천천히 형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침묵하다 목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 왜 그러셨소, 형님.


내 목소리는 분명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핏줄이라는 질긴 인연이 끊어지는 비명을 들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형은 내 물음에도 여전히 독기 서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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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긴 왜여! 니 까짓 게 저 늙은 놈과 한패가 돼서 날 능멸해서지! 어쩐지, 갑자기 들이닥쳐설랑 산을 돌려달라 할 때부터 내 진즉에 알아봤당게.


- 형님, 동굴 안에 들어가서 구슬을 훔쳐 나온 사람이 형님이라 들었소. 그 말이 참말이오잉? 대관절 그 구슬로 뭘 어떡하려고 그러셨소. 그리고 산신령 호랑이가 떡 하고 지키는 델 어치케 들어갔단 말이오?


-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러는 넌, 어치케 들어갔는디? 내가 되묻고 싶은 말이구먼. 죽은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장남인 내가 아니고 한참 모자란 네 놈한티 이 산을 주고 보물을 갖게 한 거잖여.


설령 이유가 그렇다 한들, 동생의 가족을 묶어 놓고 인질로 앞세운 일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더 억울하다는 듯 되레 화를 내며 씩씩대는 형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혀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다. 평생 형 대접하며 머리를 조아려 왔으나, 이토록 괴물 같은 자를 더는 형이라 부를 수 없었다. 나는 형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행랑아범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 아범, 가둬야 쓰겄네. 시커먼 저자들도 같이.


- 네 이놈 흥부야! 이 염병하다 뒈질 놈아! 네놈이 천벌을 어째 받으려고!


형이 서슴없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미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형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냉랭한 말투로 대꾸했다.


- 천벌? 시방 천벌이라 했소? 아버님이 글케 지키려 한 구슬을 함부로 건드린 자는 바로 당신! 형제지간 도리마저 헌신짝처럼 버린 당신이 벌을 받아야제. 당신 천벌 받는 꼴을 꼭,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것이오!


형은 동굴 안으로 끌려가면서도 악에 받쳐 저주를 퍼부었다. 멀어져 가는 비명 섞인 욕설이 폭포 소리에 차츰 씻겨 내려갔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쉽사리 아물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다시 무릎을 굽혀 아내의 품에 안긴 용순이 얼굴을 살폈다. 딸아이의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맥박은 불규칙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백룡의 기운이 용순이 몸속 어딘가에 똬리를 틀었겠지만, 그것이 아이를 살릴 약이 될지 아니면 속을 태울 독이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용순아, 네 몸에 들은 게 뭣이길래...)


행랑아범이 동굴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가 내게 말을 걸 때까지 용순이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 작은 서방님, 즈그 동굴 안 구석에서 뭘 하나 찾았는디요. 이거 좀 보셔요.


행랑아범의 목소리에 섞인 미세한 떨림이 내 등을 타고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나는 여전히 뜨거운 용순이 손을 꼭 쥔 채 고개를 들었다. 노인은 누군가 버려둔 듯한 기이한 물건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검은 가루와 함께 기분 나쁜 건초 냄새를 풍기는 향로였다.


- 아니, 시방 이게 뭔가? 이 매캐하고 이상한 냄새는 또 뭐고...


- 아무래도 요것이 산신령 호랑이를 잠재운 것 같습니다요. 대관절 큰 서방님은 이 해괴한 물건을 어데서 구한 것인지... 그리고 즈그 안쪽 벽면에 뭔가 거대한 게 빠져나온 것처럼, 크고 수상한 구멍이 있었습니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지난날 아버지가 남기신 유언이 먼 기억 속에서 다시금 요동쳤다. 그때 나는 형 대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아버지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종잇조각 하나를 내 손에 꼭 쥐여주며 이해하기 힘든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손에 쥔 종이를 펼쳐 보니 산맥과 산세를 그려 놓은 지도 같은 것이었다.


(흥부야, 네 형한테는 절대 이거 보이지 말구, 너 혼자 꼭 간직하거라잉. 이 아비가 용수산을 너한티 맡기고 가마. 그 산이 네 것이긴 하지만 또 저 하늘의 것이기도 헌께, 부디 잘 지켜야 한다... )


그 시각, 형은 아버지의 병환을 고칠 약을 지으러 간다는 핑계로 나가서 아버지의 논과 밭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조만간 자신이 꽤 넓은 땅의 주인이 될 거라 확신하며 소작인들에게 인사를 받으러 다녔다고 한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는데, 당시 내 심정이 매우 씁쓸하고 애석했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용수산을 잘 지키라고 내게 신신당부하셨거늘, 결국 형에게 산을 빼앗기며 유언을 받들지 못한 불효자가 되고 만 셈이다. 형은 단순히 보물 구슬을 훔친 것이 아니었다. 고요히 잠들어 있던 산의 기운과 맥을 강제로 침범하여 끊어 버린 것이었다.


나는 슬퍼하는 아내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는 용순이를 조심스레 등에 업었다. 맏딸과 둘째 딸 그리고 아들을 차례대로 돌아보며 나직이 말했다.


- 얘들아, 일단 용순이랑 너으 어매랑 델꼬 산 아래로 내려가자잉. 아범, 자네는 사람들을 시켜 성소가 있는 동굴 입구를 단단히 봉쇄하게.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 이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혀야 하네.


- 예, 작은 서방님. 제가 여그서 잘 지키고 있을텐께 걱정 붙들어 매십쇼. 싸게 용순 애기씨 모시고 내려가셔라. 에효, 얼른 깨어나셔야 하는디...


식구들과 함께 산을 내려가는 길, 나는 등에 업힌 용순이의 미세한 맥박을 느끼며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 울음을 애써 속으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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