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 시점)
내 등 뒤에 업힌 내내 용순이의 몸이 냉기를 내뿜다가 동굴 입구에 다다르자, 흡사 화로를 짊어진 듯 갑자기 뜨거워졌다. 가느다란 숨결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내 심장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행랑아범은 횃불을 높이 들었으나, 그의 손에서 일렁이는 불빛은 동굴의 깊은 어둠을 밀어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는 검은 도포의 사내, 흑룡의 뒤를 소리 없이 따랐다. 마침내 성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이르자 행랑아범이 멈춰 서며 벽면의 구멍을 가리켰다.
- 작은 서방님! 여그 좀 보셔유.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린 그 해괴망측한 구멍이 바로 이거지라! 이 안에서 꼭 짐승 울부짖는 소리가 나는 것 같습니다요.
행랑아범의 외침대로 동굴 벽에는 집채만 한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입구부터 칠흑 같이 어두운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 속엔 은은하게 비릿한 물 냄새가 섞여 있었다. 흑룡이 말없이 그 심연을 응시했다.
- 이 길이오. 내 천년 동안 몸을 누이며 승천의 때를 기다렸던, 폭포 아래 은신처와 연결된 통로요. 흥부여, 주저 말고 나를 따르시오. 한시라도 늦으면 그대 딸의 혼백이 저승문을 넘어버릴 것이오.
흑룡이 먼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용순이의 다리를 단단히 고쳐 업고 마른침을 삼켰다. 행랑아범은 미지의 공간에 발을 들이는 순간, 겁에 질려 다리를 휘청였으나 기필코 나와 용순이를 지키겠다는 듯 횃불을 다잡았다. 아래로 경사진 통로 내부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광활하고 위압적이었다. 벽면은 수천 년간 뭔가 드나들며 저절로 깎인 듯 매끄럽고도 기괴했다. 군데군데 뱀 비늘 같은 자국들이 화석처럼 박혀 있었고, 천장에는 딱 봐도 엄청 오래되어 보이는 초록의 이끼들이 오묘한 빛을 내며 통로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폭포 소리가 진동과 함께 희미하게 들려왔다. 마침내 통로가 끝나는 곳에 도달했을 때, 우리 앞에는 환상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로 추측했던 폭포 대신 신비로운 보랏빛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거대한 물웅덩이가 있었다. 그런데 내 눈을 먼저 사로잡은 것은 바닥에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검은 복면과 옷가지들이었다.
- 아이고! 이게 다 뭐당가요! 사람 입던 옷만 홀랑 남고 알맹이는 어데 갔는감요?
행랑아범 말대로 주인 잃은 옷들이 마치 누군가 강제로 몸만 빼내 간 듯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 옷더미들 사이로 비릿한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것은 지난번 극악무도한 악행을 일삼던 자들의 비참한 흔적으로 보였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훑었다. 그러다 물웅덩이 한구석, 가장 밝은 빛이 쏟아지는 자리에 멈춰 서 있는 잿빛 석상 하나를 발견했다. 사람 전신을 조각해 놓은 석상이었다. 맨 처음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어쩐지 익숙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 형님...?
그 얼굴은 영락없는 형, 놀부의 모습이었다. 평생 남의 것을 탐낼 때마다 일그러지던 눈매와 심술궂은 입술 주름까지 어찌나 생생하던지 당장이라도 호통을 치며 깨어날 것만 같았다. 석상은 뭔가 미친 듯이 갈구하는 것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꽉 움켜쥐고 있었는데, 손바닥 안에는 팔뚝만 한 보랏빛 돌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흑룡이 서글픈 목소리로 나직이 읊조렸다.
- 저 돌은 바로 나, 흑룡의 정기가 응축된 영석(靈石)이오. 영물이 다뤄야 할 고귀한 돌에 한낱 인간이 손을 댔으니 영험한 힘과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불타 죽은 것이오. 결국 탐내지 말아야 할걸 탐내다 저리 된 거요.
나는 홀린 듯 석상 앞으로 다가갔다. 어린 시절, 비록 성질이 고약했어도 가끔 마당에서 감을 따다가 내게 나눠주던 형의 어릴 적 모습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형은 어쩌다 이토록 차가운 돌덩이가 되어 이런 곳에서 최후를 맞이했을까.
- 형님, 왜 이런 모습으로... 제발 말 좀 해보시우, 형님!
떨리는 손을 뻗어 석상의 뺨에 손을 대는 찰나, 손가락 끝이 닿자마자 석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부서진 조각들은 기묘하게도 바닥에 닿기도 전에 고운 잿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명 한 번 남기지 못한 채 형은 그렇게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잿가루가 잦아든 바닥 빈자리에 덩그러니 떨어져 빛나고 있는 영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흥부여, 슬퍼할 시간이 없소. 의식을 시작해야 하오!
흑룡의 엄중한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흑룡은 바닥에 떨어진 보랏빛 영석을 앞발로 집어 들었다. 그러자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일렁이더니, 흑룡이 다시금 단정한 젊은 사내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내게 다가와 팔을 내밀었다.
- 그 아이를 내게 넘겨주시오. 나의 영석과 이 물에 깃든 정기만이 백룡을 안전하게 달래서 빼낼 수 있소.
나는 잠시 망설였으나, 그의 눈 속에 깃든 진심을 믿기로 했다. 나는 등에서 용순이를 내려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사내는 아이를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는, 보랏빛 광채가 소용돌이치는 물웅덩이 한가운데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물은 사내의 허리춤까지 차올랐고, 그가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수면 위로 신비로운 보랏빛 파문이 번져 나갔다. 웅덩이 깊은 곳에 도달한 사내가 영석을 높이 치켜들자, 동굴 전체가 진동했고 그의 입술에서 뜻 모를 주문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었다. 마치 천상의 문을 두드리는 장엄한 부름 같았다.
- 작은 서방님! 저그 좀 보셔유! 물속에서 빛이 납니다요!
정말 물웅덩이 속에서 사내와 용순이를 감싼 채 엄청 큰 빛기둥이 동굴 천장을 뚫고 솟구쳤다. 동굴 위는 뻥 뚫린 채로 하늘과 이어졌다. 사내가 주문을 외울수록 용순이의 입에서 눈부신 하얀 빛줄기가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름다우면서도 흉폭한 백룡 이무기의 기운이었다. 이상하게도 빛이 빠져나갈수록 용순이의 안색은 다시 창백해졌고, 멀리서 지켜보는 내 눈에도 아이의 맥박이 힘없이 잦아드는 게 보였다.
- 안 돼! 용순아! 정신 차려라! 아부지가 여그 있잖어!
나는 물가로 다가가 절규했다. 사내 품에서 축 늘어진 용순이의 손을 보며 내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라리 날 데려가 달라고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으로 빌던 그때, 내 간절한 눈물 한 방울이 물웅덩이의 표면에 닿아 파문을 일으켰다.
내 눈물의 진동이 그곳까지 전달된 것일까. 요동치며 아이를 괴롭히던 백룡의 거친 기운이 거짓말처럼 온순해졌다. 사내의 손에 들린 영석이 강렬한 보랏빛을 내뿜으며 백룡의 기운을 확 감싸 안았고, 드디어 백룡의 영혼이 용순이의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하늘로 솟구쳤다. 이제 자유로워진 백룡이 용순이의 머리 위로 다시 내려와 기다란 몸을 역동적으로 비틀고 눈부신 빛 조각들을 뿌리며 서너 차례 같은 자리를 빙빙 돌았다.
동굴 안은 눈을 뜨기 힘들 만큼 휘황찬란한 하얀빛으로 가득 찼다. 물웅덩이 속에서 용순이를 안고 있던 젊은 사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검은 용으로 변했다. 분리된 하얀빛 역시 눈부신 백룡의 형상을 제대로 갖추었다. 두 마리의 용은 서로의 몸을 나선형으로 감싸 안으며 하늘을 향해 비상했다. 천둥 같은 포효가 동굴을 뒤흔들고 폭포수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흑룡과 백룡은 드디어 각자의 여의주를 되찾아 입에 물고, 천년의 업보를 한꺼번에 씻어내듯 밤하늘 위로 솟구쳤다. 그러자 새벽녘 하늘이 서광으로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새 아침이 밝아오는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용수산의 끊어졌던 맥이 완전히 이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폭풍우 같던 의식이 끝나고, 깨끗하게 치유된 용순이가 조각배를 타고 누운 것처럼 물에 두둥실 뜬 채로 내게로 떠내려왔다. 나는 눈앞까지 떠내려 온 용순이를 물 밖으로 건져내고 조심히 품 안에 안았다.
- 흥부여, 은혜는 이것으로 갚았소. 이 아이는 이제 산의 축복을 받은 존재로 살아갈 것이오.
저 멀리 하늘 위에서 마지막으로 말을 마친 흑룡과 백룡의 형체가 차츰 흐릿해지더니 공중으로 스르르 사라졌다. 용순이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다소곳이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이마를 짚었다. 기적이었다. 열은 내렸고 흉측한 비늘무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용순이가 천천히 눈을 뜨고 날 알아보더니 해맑게 웃었다. 아이의 눈동자가 잠시 신비로운 금빛 광채를 띠더니, 이내 맑고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 돌아왔다.
- 아부지... 꿈속에서 아주 큰 박을 탔어유. 고러케롬 시원하고 맛난 박은 평생 처음이었슈.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아이가 방금 꿈에서 본 것을 얘기했다. 다행히 아이에게 아프고 괴로운 기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눈가가 촉촉해진 행랑아범이 우리 곁에서 고개를 돌리고 앉았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그렇게 한참 울먹이고 나서야 가까스로 진정할 수 있었다.
나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행랑아범이 동굴 안을 두리번 살펴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또 발견했다. 마침 동굴 천장이 뚫려 확 트이는 바람에 빛이 안으로 스며들어 벽면 구석까지 훤히 비췄다. 구석진 곳에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보랏빛 검은 구슬을 모셔둔 성소가 바로 이 계단과 이어졌고, 알고 보니 두 곳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계단 끝까지 올라가 성소로 통하는 비밀의 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과연 제단 위 움푹 파인 구멍에 구슬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은 본래 주인인 흑룡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우리는 용순이를 데리고 성소 입구를 통해 서둘러 빠져나왔다. 마치 미로 속 같은 길을 정신없이 빠져나오다가, 도중에 동굴 일부가 무너져 흑룡의 은신처 구멍이 바위에 뒤덮여 막힌 것을 보았다. 나는 무너진 바위 더미를 바라보며 놀부 형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끊임없는 탐욕에 저당 잡혀 연기처럼 사라진 형의 허망한 죽음이 참으로 애석했다.
나는 아버지가 내게 맡긴 이 용수산을 평생 지키는 수호자로 살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용수산의 푸른 산맥이 우리 가족과 마을의 앞날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길 빌었다. 그렇게 백룡과 흑룡에 의해 천년 동안 이어졌던 전설은 마침내 가슴 벅차고도 평온한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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