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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명 이영주 Oct 18. 2019

비석

은명

여름 백운산은 음습하였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은 비단 무더위뿐만은 아니었다. 경찰모 옆으로 땀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공비들은 야간을 틈타 마을과 인가를 습격한 뒤 재빨리 산속으로 숨어들어 움직이지 않았다. 농가는 물론 관공서와 시설물들의 피해가 컸다.


작전은 일망타진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작전의 범위가 묘연하였다. 적들의 소재와 규모가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리멸렬한 작전이랄 것도 없는 공방이 이어졌고 여름 해는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고 경찰은 경찰대로 밀랍 녹듯 녹아내리고 있었다.


은명은 작전 동원 명령이 떨어지자 동료 몇과 함께 대기하다가 두 편대로 나뉘어 하나는 계곡을 훑어 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능선 팔부쯤에서 계곡 쪽과 교신하며 위로 적들을 몰아 올린다는 작전을 전달받았다. 그는 계곡 쪽이었다. 새로울 건 없었다. 사흘 전에도 계곡을 훑었지만 살아있는 공비를 보지는 못하였다. 오늘은 어찌 되었든 공비 한 둘이라도 잡아야 한 며칠은 잠잠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계곡 쪽으로 걸음을 조심스레 옮겼다.


더웠다. 순간 능선 쪽에서 '적이다!'라는 외침이 들렸다. 어느 쪽에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여기저기서 총성이 들렸다. 은명은 주위를 살폈다. 열 발쯤 떨어진 곳에 동료 하나가 눈을 희번덕이며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다른 쪽을 보니 동료 하나가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미동도 없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은명은 귓가에서 피잉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계곡에서 고립되면 곤란하다. 능선 쪽 편대와 너무 사이가 벌어지면 위험하다. 다른 편대원들의 위치가 묘연했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휘감는 사이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퍽! 혹은 탕! 어느 쪽이었는지 모른다. 은명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일순간 뒤통수 언저리가 뜨끈해졌다가 이내 앞이 캄캄했다. 뭐라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하늘이 빙 돌면서 주위가 하얘졌다. 하얗게 소용돌이치는 하늘을 배경으로 배부른 아내가 잠시 뭐라 하는 것 같았는데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런 장면들은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다. 동남향 양지바른 바닷가의 작은 묘역 한켠 야트막한 봉분 앞의 회색 화강암 작은 비석 앞면에는 망자의 이름이, 뒷면에는 '모년 모월 모일 백운산 전투에서 작전 중 전사'라고 반듯한 서체로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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