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 듣기 좋은 것보다 원래 생각했던 것이 낫다.
사업을 한답시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1999년부터 그것도 딱 2년 반. 개포동에 15평 아파트를 2억 도 안 되는, 양도세면제 조건으로, 가격으로 사놓고 전세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홍대 앞 동교동 원룸 오피스텔에서 살면서 사업을 한답시고 정신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던 시절이다. 사람들을 만나려면 술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만남의 끝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는 남이가?’로 꼭 마무리하곤 했다. 실제는 모두가 남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동교동은 거기가 집인지, 일터인지, 아니면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인지 내게는 정체성이 많이 애매한 곳이어서 지금도 그곳을 지나면 그 애매함이 생각나서 씁쓸하다. 그곳을 바라볼 제대로 된 가치관을 가질 수가 없었던 거지.
0이 세 개나 붙는 2000년이 되면 전산시스템에 엄청난 혼란이 밀려올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던 시절에 장인이 후두암으로 돌아가셨다. 내가 아버님이라고 부르던 것을 못마땅해하시던 장인께서, 서울 월곡동에 장모님께서 세워 올린 4층짜리 다세대 건물 옥탑에서 늘 소리 없이 사시고 고작 작은 양의 식사 (그러나 엄청 고단백인 보신탕)만 하시곤 했던 장인께서 갑작스레 병원에 입원하시더니 돌아가셨다. 2남 5녀의 막내인 아내가 유독 많이 슬퍼했던 계절이었다.
내가 무척이나 사랑했던 장모님께서 월곡동 33평의 땅에 4층 건물을 올리고 층마다 월세 가구를 총총히 두시고 월세를 거두며 사셨는데, 시간만 되면 리어카를 끌고 나가셔서 동네에 버려진 폐지 등을 주워 모아 매일 6천 원 7천 원 벌어 꼬깃꼬깃 모으며 사셨다. 처가 자식들은 그렇게 꼬깃꼬깃 모은 돈을 목돈으로 한 묶음씩 가져갔다.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던 나도 장모님의 강권에 그 다가구건물 1층에 12평도 안 되는 곳에 얹혀살던 때였지만 살던 사람을 빚내서 내보냈기에 그 빚 이자를 꼬박꼬박 갚으며 살았다. 그렇게 자식들을 모두 품고 사셨다.
병원에 들어서면 간호사가 작은 통을 하나 주면서 작은 텔레비전과 침대가 있는 방으로 안내를 했다. 그 방에 있는 텔레비전은 다른 프로그램은 안 나오는 것이었다. 목표를 달성하고 작은 통을 간호사에게 건네주고 병원을 다시 나왔다. 그러기를 여러 번.
청양에서 연락이 왔다. 친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결혼한 지 1년이 갓 지났을 때였으리라.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인 우리 아버지의 아들 넷과 며느리 셋이서 함께 그 상을 다 치렀다. 상을 마치고 서울에 도착한 밤, 아내가 방구석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배를 아파했다. 첫 임신이었나 보다, 아내도 몰랐던 사이에 유산이란 것을 한게다. 그리고 한참을 울었다. 아내도 울고 나도 울고.
그러던 아내가 임신을 하고 동교동에 이사를 했던 때 아내는 집에 늘 혼자였다. 시장통이 지척인데도 혼자 나가 먹는 것이 부끄럽고 불편했던 아내는 그렇게 집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짜장면 한 그릇 시켜놓고 그 짜장면 쳐다보며 서글프게 울었다 한다. 화장실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또 그렇게 울었다 한다. 그때 첫 아이가 그 뱃속에서 그렇게 엄마랑 같이 슬퍼했던 것 같다.
그러다 장인이 돌아가시고 갑작스레 놀란 통에 뱃속 첫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한바뀌를 빙그르르 돌아 머리를 위로 하고 섰다고 해서, 자연분만이 어렵게 되었다. 내 세대의 항렬은 범 / 동방 인자였다. 내 다음 세대의 항렬은 여름 하자였고. 태몽도 그렇고, 배 모양도 그렇고, 꼭 아들이라 하셔서 아버지가 빼어날 준 자를 붙여 준하로 이름을 미리 지어주셔서, 태명도 없이 우리는 뱃속에 있을 때 내내 우리는 아이를 준하라고 불렀다.
보호자님 어디 계세요? 축하합니다. 예쁜 공주님입니다. 뭐라고? 왜 공주지? 모든 게 다 아들로 수렴한다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공주지? 아이를 보았다. 갓 태어나서 그런지 피부빛깔도 생김새도 이상했다. 더더욱 공주라 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뭐지? 옷가지를 챙기러 동교동 집에 가서 침대맡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들 태어나면 순서대로 할 일들을 빼곡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 생각도 안 났다. 두 시간쯤 지났나 보다. 병원에 갔더니 보호자 없어졌다고 난리가 좀 났던 모양이다.
“아버지, 첫 아이 나왔습니다. 딸입니다.” 잠시 적막이 흐르더니, “어 축하한다, 그래. 이름은 너 좋을 대로 생각해서 짓거라”. 나보다 더 아들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난 장남도 아닌데, 장남이 이미 첫아들을 낳아서 그 아들이 잘 크고 있는데. 그냥 빼어날 준 자에 여름 하자를 붙여 출생신고를 했다. 그 아이를 아내는 손에 올려놓고 매일 말도 못 하는 아이 얼굴에 대해 별말을 다 해댔다. 씻고 빨고 청소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는 아이도 너무 씻겨댔다. 그렇게 씻겨대는 통에 그 얼굴이 아마도 조금은 원래보다 닳았을 거다.
어디만 가면 엄마가 없어질까 봐 엄마랑 떼어놓을까 봐 기저귀가방 움켜잡고 빽빽 울어대던 그 아이. 둘째가 태어난 이후로 엄마의 손이 덜 닿자 할머니 손을 타며 민감하게 울어대던 그 아이. 엄마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새벽 6호선 전철로 명동에 있는 대만국제학교 유치원에 다니며 중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던 그 아이, 마루타처럼 싱가포르에 갔을 때도, 홍콩에 갔을 때도 때로는 엄마의 통역사로 원론적으로는 엄마의 교육시험도구로 키워져 갔던 그 아이. 이제 그 아이가 다다음주면 의대를 졸업한다. 영국에서. 8월 28일이면 인턴을 시작한다고 한다.
학교를 다니며 후배들 강의 등을 하며 아르바이트로 용던을 벌곤 했던 큰 아이가 어느 날 런던에 맛있는 커피를 직접 로스팅하는 곳이 있다고 하더니, 아침에 운동가는 나와 아내를 데리고 런던 배터시파크 철도옆 근처에 있는 커피숍으로 데리고 갔다. 너무 맛있게 먹는 우리를 보면서, “에고 맛있어? 내가 이 맛에 돈 벌지”. 4만 파운드가 조금 안된다고 한다. 첫 해 연봉이라던데. 세금 빼고 십일조 빼고 절반 뚝 떼어서 ISA 계좌에 넣고 나면 한 1,000파운드 조금 더 남나 보다. 그걸로 매월 살아 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아이가 귀엽다.
매 순간, 우리에게 큰 기쁨과 감사를 안겨주곤 했던 그 아이가 이제 사회로 나간다. 한편 한편 준비해서 자신의 인생을 쌓아 올리더니 이제 어느덧 영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그것도 아픈 사람들을 돕는 의사선생님으로 새 출발을 하려 한다.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내가 사회에 첫 발을 디뎠을 때로 돌아가 보니, 지금 이 아이는 엄청 설레겠다 싶다. 같이 설레줘야겠다. 런던에 있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시작의 설렘이 평생 그 아이의 삶의 궤적 속에 가득 찰 여러 다른 종류의 설렘으로 진화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