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테제: 삶은 상호의존적으로 살아진다, 공유하는 연결망을 통해
살아간다, 하고 능동적으로 말을 해야 할지 오래도록 망설였다.
삶은 살아가는 것일까, 살아지는 것일까? 전자에 방점을 찍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능동과 수동 사이 그 어드메를 가리키는 언어가 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아녜스 바르다는 그 어드메를 언어가 아닌 이미지와 동작으로 너무나 잘 포착해내는 사람인데 (그것도 자신의 삶을 중심으로) ‘살아간다’에 좀 더 가까운 JR과 함께하며 바르다 자신은 ‘살아진다’에 좀 더 기대는 듯하다. 그 모습을 어떠한 판단 없이 무미 & 건조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어 한참을 더듬어 들어맞는 언어를 떠올려 보았는데 아직은 찾지 못했다. 그저, 적정한 거리의 연대, 하고 붙여본다.
영화는 파리 한복판을 함께 살아가며 슬쩍슬쩍 마주친 바르다와 JR의 모습을 재현한다. 빵집에서, 클럽에서, 거리에서 이들은 같은 공간을 스쳐가지만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대한민국 대도시 어디서든 언제나 벌어지는 일처럼. 바르다의 딸이 연결해준 이 둘의 만남은 일련의 작업으로 이어지는데,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두 사람의 티키타카에 초점을 맞추어 이 작업을 따라간다. 앞서 적정한 거리의 연대라고 이름을 붙여보았는데, 영화를 관장하는 카메라의 시선 또한 그러하다. 피사체를 ‘피’로 대하지 않으려는 예술가들의 부단한 마음 씀씀이를 카메라가 보듬는 듯하다.
문득, 이런 삶(다름을 존중하며 함께하려는 삶)은 예술가들에게만 가능한 삶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 한다면 좌절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각자의 삶은 그 안에서 예술을 이루고 있다 생각하면 별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말미에 나오는 고다르의 자취는 여러 의미를 띠며 다가오는데, 더욱이 그가 선택한 죽음의 방식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오롯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도 살아지는 삶, 죽음까지도. 한때는 그런 삶을 동경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동경했던 면면이 무엇인지 잘근잘근 곱씹으며 명료화해보려 하고 있다. 누군가의 삶을 동경한다는 것은 극도로 추상적이기도 하지만 극도로 구체적이기도 하므로, 그리고 추상에서 벗어나 나올 때 내 삶에서 응용(?)해볼 수 있을 것이므로.)
이 영화를 다루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하지만 보고 또 보아도, 내가 그들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없음을(많지 않음을) 깨닫기만 할 뿐, 언어로 표현할 생각거리가 떠오르질 않았다. 그저 뭉뚱그린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그 느낌이 내게는 동력이 되므로, 이렇게 영화를 소개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또한 떠오르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