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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Apr 24. 2020

아무 생각 안하고 싶어요

페인트칠이 가져다 준 평화

자가격리를 하면서 이케아IKEA의 마음을 헤아렸다. 집안에만 있다보면 그렇게 눈에 뭐가 걸리는구나. 바꾸고 싶고 고치고 싶고 그렇구나. 그러나 나는 게으르지. 그렇지.


40년을 천재라고 여기며-우기며-집안 정리에 게으른 내가 이 정도까지 답답함을 느끼고 뭔가 해치워야겠다고 팔을 걷어붙인건 놀랄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재란 엉망진창인 책상에도 '질서가 있다'고 우기는-여기는-뭐 그런거다.


하지만 아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국에 돌아와 친구의 추천으로 약을 바꾸었고, 그래서 자주 멍을 때리고, 그 멍을 생각보다 아주 잘 때리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엄마가 챙겨주는 세끼 식사 다 (쳐)먹고, 수면제에 신경 안정제 때문에 잠까지 잘 자니, 인생 최고 몸무게를 찍어버렸잖나. 살천지에 놀아나 버려 찌뿌둥한 와중에 어수선한 공간을 정리하고, 끝없는 필요를 선택해 삶을 정돈하는 것, 거기에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말레이시아 텅빈 방에 의미 없는 월세를 보내는 것, 한국에서의 삶을 버텨내기 위해 꾸준히 약을 먹는 것, 기운을 내어 꼭 해야 할일을 하고 버티기 위한 새로운 일을 찾는 것.


이 모든걸 동시에 잘 해내는 건 공황장애와 수면장애인에겐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에 실망하지 않기,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불안에 괜한 불안 더하지 않기,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않기, 당장 아주 자그마한 뭐라도 하기-면봉으로 귀 청소하기,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 치우기-로 다시 살아낼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어려워도 해봄직하다.


그래서 내가, 심지어 내가, 평생 한번도 안 만져본 페인트를 샀다. 두가지 색으로. 어떻게 칠할 줄도 모르고, 어떤 느낌을 줄지도 생각하지 않게, 게으르게. 그렇게.


그리고 그냥 뚜껑을 열어, 칠했다. 엉망진창으로. 이게 무슨 고려청자 구울 일이냐, 초벌구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마구 칠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했던 건 '힘들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그만하자'.


오늘은 여기까지

첫날, 문을 칠했다. 생각보다 깔끔하겐 안되더라

그래 뭐 버려. 대단한 문도 아닌데.

둘째 날, 문 하나를 더 칠했다. 바닥에 페인트를 떨어뜨리고 바지에 결국 그림을 그렸다.     

그래 뭐 귀한 옷도 아니고 수성페인트니까 빨리겠지

셋째날, 뭔가 좀 과괌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꾸덕꾸덕한 페인트로 눈에 보이는 온 구석을 다 칠하기 시작했다.

아래도 칠했다가, 위도 칠했다가, 수평으로도, 수직으로도, 마구 칠했다. 앞으로 내가 이 방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면, 내가 일하고, 내가 쉬고, 내가 고민하는 이 곳인 나에게 어떤 영감을 줄 있을 지를 생각하면서 붓을 휘두르는 거였다. 세월의 얼굴을 가진 샛누런 벽지위에, 10년 넘게 검은 색이었던 장식장 서랍에, 고딩때부터 쓴거 같은 나무 책상에 페인트칠을 했다. 재밌을 만큼만, 안 지겨울 만큼만. 마음이 힘들지 않을 만큼만.


거기에 한참 재미붙인 당근마켓 중고 판매로 "곤도마리에ing" 중이라서 지금 약 68% 정도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1) 알라인 중고서적 83권 판매

2. 마블 굿즈 판매 2건 판매

3. 스쿼드 운동기 1건 판매

4. 굿프렌드 건식족욕기 1건 예정

5. 마라톤 타자기 예정

6, 그외 다수.

이것들만 다 팔고 팔리고 끝나면, 공간면에서든, 의미면에서든, 좀 좋아질것 같았다.


글고 그 엉망진창인 와중에 게으른 내가 이걸 했다. 천지개벽 수준.


이제 사람이 살 수 있다
침대 헤드, 머리맡 거울, 원래 하얗던 책상 서랍, 베게 커버, 볼스터 컬러를 유사하게 맞추고, 그걸 끌어안을 색으로 베이비 핑크를 고른건 신의한수 였다고 자화자찬함.


드러누웠다가
나가는 것말고
 쓰임새가 없었던 이 곳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어두컴컴한 벽에 페인트칠을 하는게 그렇게 행복했다. 투박하든 섬세하든, 꼼꼼하고 촉촉하든, 모든 페인트붓의 반복 움직임에는 힘이 실리고, 마음이 얹히고, 슬픔이 들리고, 위로가 퍼지더라. 아무 생각을 안하고 싶었지만 나는 나의 힘에 대해 생각했다. 이틀전 얘기 나눈 친구화의 대화도 생각했다. 3일뒤 끊어야 하는 스트레스 받을 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잘 칠하고 있나, 어디 묻지는 않나도 생각했다. 그렇게 멍안멍 상태로 페인트칠을 하면서 벽 속에 그 모든 생각들을 묻어버렸다. 너른 붓이 한번 찐하게 지나가면, 시름도, 고통도 그 뒤로 뽀얗게 스며들어간 느낌으로. 그리고 생각하는 건, 페인트의 농도와, 붓이 움직일 방향, 새로 메꿔야 하는 곳, 붓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달라지는 패턴과 리페이팅 등. 오늘 아침 공황 약을 먹었더라 안 먹었더라와 상관없이, 반복적이고, 일견 창의적인 색의 움직임이 보여주는 평안함을 느끼고 또 느꼈다.


자꾸 칠하고 싶어지더라


나 같은 생각 귀신이 40년 살면서, 잡다한 생각에 파묻히지 않는 유일한 순간을 찾은 게 딱 세 가지였는데, 오랜만에 하나를 더 찾았다.


스쿠버 다이빙, 요가, 달리기, 그리고 거기에 더해 페인트칠. 그걸 4일에 걸쳐, 아무렇게나 시작했고, 아무렇게나 칠했는데 마음에 꽤 든다. 칠을 아무렇게나 시작했고, 더 칠하고 싶지 않을 때 당장 붓을 내려놓으면서, 4일을 그랬다. 그랬더나 투박하지만 나름 예쁜, 그런 방이 생겼다.


수납하기 힘든 물품 정리에는 닥치고 3M코맨드죠
나란 남자, 단정한 남자


반복적인 스슷, 사삭 소리, 더러움을 덮어주는 안온함, 붓칠 방향, 모서리와 코너를 칠할 때의 마음. 붓을 세게 누르며 칠하는 느낌, 붓을 졸졸 돌려가며 칠하는 느낌 모두, 좋았다.


아직 책상 앞 벽이 남고, 큰 창틀이 그대로인데 이걸 어찌해야 할까. 게으르게 두고 보다가 어느 날 들꽃에서 본 색으로 칠해볼까. 아님 빈티지 코너로 그냥 그냥 남겨둘까. 아님 마음이 편해질 만한 팬톤 컬러 페인트를 마지막으로 하나 더 사볼까. 그게 오면, 또 여기저기 칠해지고 싶어지는 마음이 되진 않을까.


아무 생각 안하고 싶은 마음으로, 30일을 이렇게 조각내서, 빻고, 갈았다. 매시간 1mm속도로. 열어 둔 페인트 뚜껑과 함께 자고 일어나고. 마스킹 테이프 마구 붙이고 싶은 욕구를 꾹꾹 잘 눌러, 숨도 쉬지 않고 줄 맞춰 붙이고는 '아 또 하나의 인생의 산을 그런대로 멋지게 넘었다'라고 생각했다.


아파트앞 화단이 이렇게 예쁜데. 하긴 뭘 해.

그런 마음이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싶은 마음은.

단지 조용하지만 매우 빠른 삶의 결정들이 있을 뿐이다.

'의미있는가?'


둘 중에 하나만 골라 YES OR NO.

YES만 천천히. 자유롭게. 무한히.


NO가 버거운 날들이니까.



오늘 저녁에 너무 피곤해 자다 깨는 바람에 방금 수면제를 먹었다.

YES의 세상도 NO의 세상도 없는 "그냥"의 세상에서 좀 쉬다가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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