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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May 18. 2020

덜 만나고 싶은 거라고요.

그 마음도 소중해요.

누군가로부터 끝없이 도망치고 있는가, 라는 화두는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곤 한다. 나는 사람에 대하여 오만한가. 그들을 단죄하고 있는가. 때로 비겁한가. 한편으론 용기가 없는가. 뭐 그런 생각들. 이보다 더 좋은 파트너는 없지 않을까 들떴던 사람. 한때는 친구라 믿었던 이들, 언젠가는 사랑이라고 믿었던 대상, 그런 사람들로부터 나는 도망치고 있는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그런 생각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재미있고 즐겁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마땅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는 즐거운 게 맞다'고 여긴 자의식 과잉이거나,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나를 위해 쌓은 허상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아채는 데 오래 걸렸지만.




가볍게 스쳐 지나가도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하는데 과도한 힘을 쏟아부어버리면, 그 관성이 언젠가, 부단히 애썼던 자의 발목을 잡는다. 사람을 대하는 것까지 어떤 완벽한 결과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그 관성의 사슬을 끊는 데 엄청난 고통이 필요하다. 애써왔던 관성 때문에 이제와 사람을 배척하거나 버릴 수는 없다며 자신을 옥죄고, "너는 원래 살갑잖아"라고 각인된 이미지로 나를 규정하는 이들의 압도감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나는 꽤 애썼지만 상대는 전혀 애쓰려 들지 않았던, 그렇고 그런 관계에서, 또다시 내 애씀이 마중물이나 윤활유처럼 쓰이지 않으면 유지할 필요가 없는 허술한 접점. 그런 점을 억지로 또 잇고 잇는 게 의미가 있을까. 상처 받으면서, 탈진하면서.


나의 능력이든, 노력이든, 지식이든, 마음이든, 공짜 부속품으로 순대에 따라가는 돼지 간처럼, 무심히 썩둑 썰어서 내놓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지필 불쏘시개가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나 하나 지키는 것도 버거운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불확실한 신뢰와 존중, 허섭한 연대와 배려에 쏟을 시간도, 정력도 없다는 게 맞겠다.




불에 한번 데고 나면 '뜨거움'이란 게 뭔지 정확히 알게 된다. 어디가 어떤 느낌으로 아프고 화끈거렸는지 잊을 수 없다.


그러니 중허지 않은 관계의 누군가를 안 만나는 것, 덜  만나는 것은 내가 나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데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이미 데어봤고, 여러 번 데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나에게 그렇게 '덜 만나고자 함'의 노력이 남아있다는 건, 나를 지키고 싶다는 힘이 예전보다 조금은 커졌다는 거다. 나를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나를 집어던졌던 한심한 세월들이 안타깝다는 거다.


불처럼 델 걸 뻔히 알면서 데고, 또 데어 기억하기 싫은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얼음을 갖다 대는 노력을 나만 해야 하는 관계라면, 그 관계에서 잠시 몇 발짝 멀어져 자신을 더 사랑하는 방법을 찾든지, 차라리 더 미친듯이 데어 단단히 정신 차리는 쪽도 방법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사실 "돌덩이" 아니라서, 누가 그렇게까지 나를 깎고 때리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런 관계에 " 전부를 내걸고" 싶지 않다는 거다.




비자발적 언택트의 시대가 왔다. 이렇게 아무도 만나지 못하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이렇게 답답하게, 홀로 외롭게, 대체 뭘 하며 살 수 있느냐는 곡소리도 나오지만, 당신이 이제껏 인지하고 있지 않던 어떤 사람들은, 언택트의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덜 만나는 자유를 알게 된 사람들이 스스로 더욱 단단해질 좋은 시기가 왔다. 덜 만나는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자신을 더 사랑하는데 쓸 수 있는.  


그리고 나는,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자연이 고마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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