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아홉가지 방법
누구나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상처없이 사는 인생이 어디 있던가.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그날의 말 한마디. 당신의 차가웠던 표정. 매서운 눈빛. 그대의 뒷모습. 그뿐인가. 상사의 꾸지람. 친구의 비난. 인생의 모질고 복잡한 문제들. 우리는 이렇게 마음이 '꾸깃꾸깃'해지는 것만 같은 수많은 경험을 안고 살아간다.
자존감이 높고 회복탄력성이 매우 강한 사람들은 상처를 받더라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누구에게나 그리 쉬운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쉽게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이 어느 순간 내 발목을 잡는 듯한 느낌이 들때는, 멈추어 천천히 숨을 고르고, 구겨져 버린 마음을 위한 다림질을 해야 한다. 잔뜩 구겨진 옷을 그대로 입고 밖에 나갔던 그 불편한 하루를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지 않나. 30년을 훌쩍 넘게 살았지만, 물론 나도 이 다림질이 쉽지만은 않았다. 작은 그릇과 예민한 성격 탓인지, 생채기를 내려놓기가 너무 힘들다. 가라앉혔다 생각해도 자꾸만 다시 떠오르고 부글부글 끓기를 반복한다.
여기, 구겨진 마음을 다림질 하기 위해 '나에게 잘 맞는 방법'을 공유하고자 한다. 일부러 이렇게 풀었다. '나에게 잘 맞는 방법.' 뭔가 대단하고 비밀스런 '나만의 방법'은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열려 있는 취미, 여가 생활이기 때문인데, 어라? 이게 무슨 방법일까 싶을 수도 있고, 뜯어보면 정말 별거 없다 느낄 수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왜 이것들이 나의 상처를 보다듬어 주는 것들인지 말하고 싶다.
1. 나를 바라보는, '바로'보는 힘, 요가
요가는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바로'보는 수련이다. 숨을 깊게 천천히 들이쉬고 내쉴 때의 고요함과 안온한 느낌이 좋다. 내 몸을 관찰하고 숨에 집중하는 그 순간이 마음에 든다. 요가 수련을 하고 있으면, 어제의 일, 내일의 일이 생각나지 않고, 자연스레 지금의 나, 내 마음, 내 상태, 내 자세에만 집중하게 된다. 요가 덕분일까. 고질적으로 일상을 힘들게 했던 일자목, 어깨 통증, 담도 모두 사라졌다. 자신의 마음을 바라다보며 평온한 상태를 찾고, 순간에 집중하는 힘을 길러주는데, 정말 요가만한 게 없는 것 같다.
화가 나고 상처가 나는 과정도 모두 일련의 '무너짐'이다. 다시 밸런스를 찾아가는 것은 마치 요가 수련의 과정과 같다. 요가를 할 때, 현재의 몸과 마음의 균형에만 집중하지 않으면, 그 어떤 자세도 쉽게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 단순한 반복에서,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나의 마음에 귀기울이고 집중해야, 나만의 밸런스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조만간, 지도자 과정도 수강해볼 생각이다. 첫째, 이 좋은 걸 좋은 사람들에게 '잘 나누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둘째, 제대로, 올바로 수련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2. 뇌를 위한 최상의 휴식, 미지의 바다를 헤엄치는, 독서
언제나 끊임없이 피로를 느끼는 우리의 뇌. 뇌를 쉬게하는 최상의 휴식법은 '멍때리기'가 아니라 바로 '독서'라 한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고, 지친 감정의 위로를 받는다. 때문에 나는, 독서가 '치유의 유익함'을 가졌다고 굳게 믿는다. 세상에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정말 많았구나 하는 순간, 지금껏 내가 연연했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것들인지 느끼게 된다. '영혼이란 나무'가 시들지 않도록 물을 주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독서다.
나는 '페이퍼'를 통해 전자책을 휴대하고 어디서든 꺼내 읽는 걸 좋아하는데, 첫째, 휴대가 편해 독서가 더 이상 귀찮거나 거추장스럽지 않고, 둘째, 유난히 그날따라 읽기가 부담스런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디바이스 안의 다른 책으로 유연히 파도를 타며 넘나들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무척 가볍고 사용이 편리하다. 3년전 페이퍼를 구매하고 나서 읽은 책이 족히 200권 정도는 되는것 같다. 나에겐 페이퍼가 지름신이 선물해 주신 인생템 중에 하나다. e-book을 읽기에 스마트폰도 충분히 훌륭한 디바이스는 맞지만, 전자책은 오롯이 독서환경에만 집중할 수 있는 성능과 편안함을 가졌다. 눈에도 부담이 없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추천하는 바다.
3. "You are what you eat." 당신이 먹는 모든 것이 당신이 된다, 요리
사실, 요리는 내 특기라거나 장점이라 말할 순 없다. 뭐, 대단한 요리를 만들지도 못한다. 다만, 요리의 시작과 끝까지의 과정이 충분히 즐겁다고 느낀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그래서 어떤 재료를 살지, 어떻게 요리할지, 이 소스를 쓸지, 저 양념을 쓸지를 생각한다. 무엇을 더 넣으면 더 맛있을지, 무엇을 살짝 빼면 먹는 이에게 부담이 덜할지. 내가 고민하고, 생각하고, 만들고자 했던게, 결과물로 빠지지 않고 가득 그릇에 예쁘게 담긴다. 내 마음씀의 결정체다.
어떻게 보면, 요리의 모든 순간, 모든 과정이 '창작'이며, 그릇에 담겨, 입으로 가져간 뒤, 뱃속을 든든히 하고 나서도 이러한 일련의 창작 과정은 끝나지 않는다. 결국 내가 먹은 것이 나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좋은 음식이 '좋은 나'를 만든다. 비단 나 뿐인가. '내 손 끝에서' 만들어진 요리가 나뿐아니라 누군가를 건강하게, 기분 좋게 해준다는 건 참으로 의미있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 나에게 손수 요리를 해준다는 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그러니 식기전에 냉큼 와서 먹으라는 누군가의 타박이 있을 땐, 1초도 밍기적거리지 말고 가서 먹는 것이 마땅하다. 그 사람은 지금 요리에 모두 담아넣은 내 마음을 너에게 주겠다며 테이블을 펼친 것이다.
4. 자신을 표현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 글쓰기
어렸을 때부터 뭔가 가슴속에서 터져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면, 나는 글을 쓰곤 했다. 단어와 문장, 쉼표와 마침표에 내가 느끼고 고민하는 것들이 담기는 과정이 참 좋았다. 글쓰기가 좋은 건, 그 행위를 통해 복잡다단했던 생각이 정리되고,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연필이든, 스마트폰이든, 랩탑이든, 뭐든, 글을 써보자. 처음엔 시간도 걸리고, 어려울 수도 있다. 혼자만 끄적여봐도 좋은 건 물론이다. 과정이 만만치는 않지만,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토해낸 것들을 재배열을 하고 나면, '아, 이거였구나'하는 '깨달음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때 우리는 '말하기', '쓰기', '읽기', '듣기', 마지막으로 '느끼기'까지, 모든 것을 동시다발적으로 경험한다.
눈으로 보는 글은 '내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해준다. 행간에 무엇을 남기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것 또한 철저히 내 마음이다. 지우개가 있는 글쓰기처럼 마음 편한게 있을까. 그렇게 지우고, 다시 써도 된다. 상처도 그렇게 '쓰고', '읽고', '느끼고', '귀기울여' 보면, 말끔히 지우고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내 마음의 소리를 정확히 듣는데에, 자고로 글쓰기만큼 좋은 것도 없다.
5. 매일 볼수 있는 선라이즈, 선셋이 그토록 특별한 이유, 여행
여행이 좋은 이유는 자유로이 선택한 '일탈'에 있다. 같은 모양의 트랙 위를 돌고 돌던 일상에서, 벗어나 '나를 위한 보상'처럼 모두 내려놓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여행을 위한 사전 준비나, 여행 후 선물받은 긴 여운 또한, 기분 좋은 설렘을 준다. 역으로, 여행을 마치며 내가 떠나온 곳,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도 여행의 매력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듯, 마땅히 시작이 있고, 끝이 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오늘 돌릴 빨래를 오늘 꼭 하지 못했다고 해서 아쉬워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세계 3대 석양이라고 말하는 말레이시아 코타 키나발루의 선셋을 보는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끝이 있기 때문에, 기대감이 생기고, 아쉬움도 들고, 기쁨으로 충만하며, 오랜 여운이 남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라'하는 감정은 얼마나 소중하고 애틋한가. 그렇기 때문에 여행하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보고, 느끼고, 즐기고, 기억에 남기는 여정에 최선을 다하는 내가 좋다.
좋아하는 페이지인, [ 여행에 미치다 ]의 슬로건은 "일상을 여행으로, 여행을 일상으로"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살수만 있다면,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은 소중해질 것이다.
6. 지구의 70%를 여행하는, 스쿠버다이빙
스쿠버다이버가 된지 5년이 지났다. 총 180번의 다이빙 로그Log가 쌓였고, 다양한 버디들과 수많은 추억을 쌓았다. 물속의 내 모습만큼, 눈 앞의 대상에만 집중한 순간도 찾아보기 힘들다. 형형색색의 산호, 살랑거리는 물고기,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공깃방울, 수면을 부숴뜨리며 퍼지는 햇살, 조용하고 촉촉한 빗방울 소리와 그 파문, 나이트 다이빙을 하고 출수한 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던 은하수, 파도가 깨어지면서 만드는 눈부신 거품까지, 모든게 지금도 선명한 잔상으로 남아있다.
인생 가장 힘든 시절에 시작한 스쿠버다이빙, 그맘때 내 진정한 휴식은 물속에 있는 그순간 뿐이었다. 물 속에선 고민거리도 없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다. WIFI도 없다.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진기한 생명체가 뒤엉킨 광활한 바다, 그에 비해 한껏 작은 나, 그런 나의 고독한 숨소리, 그런 초라한 나를 미끄러지듯 휘감아 쓰다듬어 주는 바다, 그뿐이다. 40-50분간 우주여행을 하듯 온몸을 바다에 맡기고 유영하다보면, 복잡한 상념과 괴로움이 물결에 쓸려간듯 금세 잊힌다. 전세계를 밟고 밟아 여행한다 해도, 인간은 지구의 30% 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지구의 70%는 바다기 때문에. 아직도 나는 갈곳이 너무 많아 신이 난다.
7. 세상 모든 경험을 할 순 없기에, 영화
요즘처럼 다양한 소재의 영화들이 쏟아져나오는 때도 없다. 상상하는 모든 것이 예전보다 더 쉽게 스크린에 옮겨지기 때문일테다. 그 때문에, 창작자와 관람객 모두에게, 기실 경험의 외연도 더 넓어지는 듯하다. 어릴적부터 영화를 좋아했었고 지금도 관심있는 영화는 놓치지 않고 찾아보고 싶어하는 욕심이 크다. 호기심도 많고, 배우고, 느끼고 싶은게 항상 많은 나는 언제나 마음이 바쁜 편이다. 다만, 이 세상 그 누구도, 삶의 모든 경험을 감당할 수는 없기 때문에, 스크린에 잘 옮겨진 이야기의 힘을 빌리려는 욕심이, 바로 내 영화감상의 주된 목적이다.
두시간 남짓 흘러가는 이야기에 몸을 맡기고 빠져 들어보면, 나는 어느새 스크린 속 주인공이 된다. 주인공의 상황을 이해해보려 애쓰고, 희노애락에 공감해 보는 그 순간이 무척 재미있다. 독서만큼 폭넓은 간접경험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나에겐 바로 영화인듯하다. 벅찬 감동과 여운, 뼈를 때리는 교훈과 동기부여는 덤이다. 잘 쓰인 이야기가 잘 그려지면, 그 이야기는 무척 힘이 세다. 적어도 120분 동안 만큼은 나를 다른 시공간으로 데려다주는 영화 속 이야기가, 그래서 참 좋다. 이 위대한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모든 영화인들에게 나는 언제나 경의를 표하고 싶다.
8. 마음도 청소가 되나요, 쓸고 닦기
사실 내가 뭔가 쓸고 닦고 정리를 잘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제발 청소 좀 해라"에 "난 괜찮은데? 나중에 할게요"로 답하는 세월 동안, 강산이 세번 정도 변했음을 고백한다. 산더미 같이 쌓아둔 물건 속에서도, 내가 찾는 물건만은 기가 막히게 쪽쪽 뽑아내는 아들래미를 참고 참아준 우리 엄마는 이시대 진정한 성녀, 성인군자 반열에 오르심이 마땅하다.
해외 생활로 부득이 혼자 살게 되면서, 청소를 나 혼자 하게 되자, 청소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달라졌다. 눈앞에 당장 보이는 먼지, 때에 집중하면 그 어떤 다른 생각도 잘 들지 않는다. 이쪽으로 쓱쓱, 저쪽으로 싹싹. 세번, 네번, 다섯번..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점점 희미하게 지워지는 얼룩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그렇게 평온해지고 속이 시원해질 수가 없다. 청소를 하고 나면 한바탕 땀에 흠뻑 젖는데 그 기분도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이런 게 소몰행, 작은 몰입의 행복이려나. 마음도 이렇게 청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잡고 청소에 집중한 순간이 주는 상쾌함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9. 애정 없이는 도무지 쉽지 않은 일, 빨래와 다림질
혼자 살면서 빨래, 다림질을 도맡아 해보니 아주 잘 알겠다. 빨래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다. 다림질도 꼭 필요한 일이지만 더더욱 귀찮다. 게다가 소름끼치는 것은, 이게 무슨 시간이 흐를수록 대단한 스킬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점점 더 잘 한다고 무슨 상을 받는 그런 것들도 아닌 거라.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아, 어머니는 대체 이 지난한 일들을 그 기나긴 세월동안 어떻게 견뎌냈을까.' 순간 뭉클하기도 했었다.
빨래를 돌리고, 꺼내고, 널고, 개고, 먼지를 떼어내는 일련의 과정에는, 그 어떤 잡념도 끼어들 자리가 없더라. 지독한 단순 반복 작업이다. 다림질은 또 어떤가. 뜨거운 다리미 앞에서 열기를 참으며 이리저리 옷을 개었다 폈다, 조심스레 당겼다 놓았다 하는 지루한 과정을 반복, 또 반복해야 한다. 입는 사람에 대한 보통의 집중과 애정 없이는 먼지 하나 없는 빨래를 개어 낼 수가 없고,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셔츠를 만들어내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더라. 집중하지 않으면, 세심하지 못하면, 빠나마나, 다리나마나한 후줄그레한 작품이 나온다.
볕에 바싹 마른 빠삭한 수건을 집어 들때의 기쁨을 아는 사람, 잘 각이 잡힌 셔츠를 입고 집을 나설때의 기쁨을 잘 아는 사람, 이미 잘 개어진 듯한 빨래를 집어들어 정리해본 사람은 알것이다. 그 옷엔 빨래와 다림질을 했던 사람의 세심함과 정성스런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다시 말하지만 지우기 힘든 상처, 숱한 모진 말들이 어느 순간 내 발목을 잡는 듯한 느낌이 들때는, 멈추어 서서 천천히 숨을 고르고, 구겨진 마음을 위한 다림질을 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달릴 힘도 생긴다. 잔뜩 구겨진 옷을 그대로 입고 외출했던 그 불편한 하루를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단순하다. 별거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다림질 방법에서 결국 내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바로 '오롯이 현재에만 집중하는 힘'이다. 요가, 독서, 요리, 글쓰기, 여행, 스쿠버다이빙, 영화보기, 청소, 빨래와 다림질을 하면서 내가 찾고 싶었던 건, 다른 거 다 빼고, 내 마음만 그대로 들여다보는 고요하고도 안온한 집중, 그것이었다.
하루에도 수천 수만가지 생각이 나를 괴롭히는 것만 같다. 세상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는 것 같다. 내 삶은 왜 이리 복잡한가. 나만 이렇게 힘든가. 나는 왜 내려놓질 못하나. 나는 왜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을까. 나만 이렇게 괴로울까 하는 모든 잡념들이 온 마음속을 휘저어 놓는 느낌이 들때, 나는 이 아홉가지 중 하나에 집중하는 노력을 통해, 평온을 찾으려 했다. 그랬더니 진통제를 먹은 것마냥,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모든 것들은, 사실 그저 잠시 머물러가는 상념일 뿐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여전히 무너질 것이다. 넘어지고 또 좌절할 것이다. 잘 흘러가나 싶으면서도 어느 순간, 납덩이처럼 무거운 마음이 나를 잠못들게 할 것이다. 그러나 또 지나갈 것이다. This, too, shall pass. 더 이상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생각이 들때, 나를 다시 궤도에 올려주는 것들은, 먼데 있는 어떤 것들이 아니라 바로 '일상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었다. 무너지지 않아야 된다는 독한 마음가짐이 나를 처절히 무너지게 한다. 무너져도 된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면 된다.
순간만 생각하자. 지나간 것에 발목잡힐 것도, 다가오지 않을 일에 표정을 구길 것도 없다. 잘 다림질 하면 된다. 언제고 다시 구겨지겠지만, 또 다시 예쁘게 잘 다리면 그만이다. 또 구겨질 것이다. 그럼 또 다리면 된다. 결국 중요한 건, 나만의 다림질 방법이 있는가, 그 방법을 대단한 것이 아닌 아주 작은 것에서도 찾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있느냐 하는 거다. 그 정도의 힘만 있어도, 우리는, 언제고 다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