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쳐라, 그것도 아주 멀리 .
'애정결핍 인간형', 말 그대로 애정이 부족한 혹은 부족했던 사람.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다. 너무도 다양하기에 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저 그 결핍이 ‘당사자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만 짚고 넘어간다. 애정결핍 인간형이 정작 힘들고 위험한 이유는, 그 부족함을 채우려는 일련의 방식에서 드러난다. 24시간 끊임없이 사랑을 채워주기만을 원하고, 상대는 아랑곳 없이 자기 결핍만 들여다보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자칫 해서는 안될 비뚤어진 장난을 하기도 한다.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은 누구나에게 있다.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애정을 바란다는게 잘못도 아니다. 다만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애정결핍 인간형'은, 그것이 한참 비뚤어졌을 때 자신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고, 남의 괴로움과 고통에는 귀막고 눈을 감아버리기 때문에 위험하다. 본인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 안중에 없다는 점에, 바로 내가 말하는 애정결핍 인간형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전화 통화를 좋아하던 그녀, A가 있었다. 짬을 내서 잠깐이라도 "내 목소리가 듣고 싶은게 너무 당연한거 아니야?"라고 묻던 사람이었다. 매일 자기 전에 60분의 통화를 ‘완료’해야 애정이 확인되던 사람. 때로 문제가 생겨서 전화를 하지 못하면, 그 다음날은 120분이어야 했다. 하다 못해 3일간 회식, 야근 등, 회사 일 때문에 새벽 한두시에 들어가서 부득이 전화를 하지 못하면, 언젠가 하루는 ‘날을 잡아’ 새벽 다섯시까지 네 시간의 통화를 해야 하던 사람. 상사와 독대하며 심각한 얘기를 하던 술자리에서, 그날 그녀는 부재중 전화를 40통 남겼다. 미리 독대 내용도 알려주고, 귀가 시간까지 귀띔해 주었건만, 그녀의 천불이 나던 40통 부재중 전화 속에, 나의 시간은 ‘부재중’이었다.
결핍을 채워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 그릇이 작았는지도 모른다. 버거운 일이었다. 매사에 피곤에 ‘쩔다시피’ 하던 내가, 새벽 네다섯 시까지 전화를 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이제야 치사하게 고백하지만, 자는 척도 해보고, 아픈 척도 해봤다. 배터리가 나가서 끊어진 척도 해봤다. 어쩔 수 없었다. 배터리를 다시 충전한 셈친 2분을 ‘제하고’, 그녀는 4시간 2분을 나와 보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쳇바퀴 돌던 당시 내 인생을, 아무리 채썰듯 쪼개어봐도 4시간 2분 동안 나는 그리 할 말도 없었다.
그녀에겐 별다른 삶도 없었다. 집, 회사, 집, 회사, 집, 회사. 친구도 별로 없었다. 내가 이름을 알아야만 했던 딱 세 명의 친구, 그 외엔 무엇도, 그 누구도 없었다. 생기발랄한 활달함이 좋아 만나게 된 그녀였지만, 그 어느 누구와 별반 끈끈함이 있지도 않았다. 취미도 없었다. 그저 오로지 하루가 나인 삶. 처음엔 고마웠다. 그녀에게 그토록 중요한 존재. 그녀의 하루를 채워준다던 나라는 사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애정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건 ‘애정’이 아니라, ‘결핍의 충전’이었다. 손님이 너무 많아 정오가 되기 전에 기름이 떨어져 문을 닫아야 하는 준비 안된 멍청한 주유소처럼, 나는 점점 둔하고 멍청해졌다.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장사를 잘하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역으로 이제 그 노력을 하면 할수록 욕을 먹기 시작했다. 그녀의 결핍을 채우느라 내가 방전되어 버렸다. 거기서 우리의 연료는 충전되지 못하고 끝이 났다. 나는 ‘도망’을 택했다.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하기 위해, 하루에 최소 '8번 이상 문자'를 보내야 한다는 또 다른 그녀 B도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기준은 대체 뭐였을까. 그게 왜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안되냐며, 그녀는 도돌이표처럼 끝도 없이 되물었다. 분명 내가 먼저 연락한 적도 많았는데, 그건 당연한 것이고, 때가 지나 문자가 오지 않으면 “그렇게 바쁘냐”, “내 생각도 안 나냐”며 묻던 그녀였다. 언제나 자기만 서운하고 언제나 속이 상해서, 24시간 아주 손쉽게 나를 나쁜 사람으로 둔갑시키던 사람.
아침 10시 매장 개장 시간부터 밤 10시까지 손님들이 들끓는 서울 시내 한복판의 매장에서 일하는 그녀는, 12시간 동안 내 문자에 답할 시간도 없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대신, 퇴근 시간이 되어 하루동안 내가 보내 놓았던 문자들을 보면, 본인이 한껏 사랑받는 느낌이 들어 행복할 것 같다며, 본인은 답도 하지 않을, 아니 할 수 없는 문자를 계속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충전’이었다.
"출근했겠네. 춥지 않았어?"
"오전에 준비할 것 많다고 했었는데, 바쁘겠구나"
"점심은 잘 먹은거지? 힘든데 고생많겠다"
"오늘은 휴일이라 사람이 더 올려나?"
"진상 손님 없어야 할텐데"
"저녁 매장 나가서 먹었나, 잘 먹었길 바라"
"끝날 시간 다 되어가네, 오늘도 다리 아팠겠다”
"이제 마치고 버스타러 가려나, 추운데 조심해"
......
퇴근하자마다 전화해 매번 ‘오늘 진짜 바빴어’로 시작하는 그녀였다. 정작 그녀가 부재중이었던, 그녀는 별반 궁금하지 않던 나의 하루가 그녀의 공간에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오늘 진짜 바빴어”로 시작되는 전화에, “힘들었구나”라며 짜증섞인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위로를 섞고, 맞장구를 치고, 같이 손님 욕까지 시원하게 해줘야 멋진 남자친구가 되는 나의 매일밤 11시.
자주 싸웠다. “오늘은 바빴나봐?”. 그녀의 속마음은 언제나 그렇듯 이미 뿔이나 있었다. 두서너 시간에 한번씩은 반드시 연락이 왔어야 하는 그녀에게 내가 소홀했던 탓인가 보다. 결국 ‘하루 8번’의 문자를 꾸준히 보내야 하는 그녀의 ‘충전’ 문제로 싸우고 싸우다, "예약 문자로 하루 스무 번이라도 보내주면 내가 널 더 사랑해서 행복하겠냐"는 말까지 하게 됐다.
미안했다. 치사했다 생각한다. 언젠가 밤을 새어 지나온 인생 얘기를 하다, 그녀가 펑펑 운 적이 있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치만 ‘거기까지’였다. 사실 내가 해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충전만 해주다가 하얗게 타버리기엔, 언젠가 영영 방전될 휴대용 배터리가 된 느낌을, 이젠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사실 그녀로 무척 행복했는데, 그녀는 왜 나로 언제나 불행한지 알 수 없었다. 나도 그녀를 좋아라 했고, 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데 그래서 불행하다는 사람. 사랑이 눈앞에 있는데, 내 곁에 있는데, 너무나 외롭고 불행했던 사람. 황량한 마음. 나는 빼쩍 말라버린 오아시스처럼, 그녀라는 황량한 사막에서 또 다시 '도망'을 택했다.
그녀 A, 그녀 B 모두, 어린 시절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마음이 아팠다. 내가 없던 그림 속에서 불행했을 것을 생각하면 애처로웠다. 다만, 그건 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운이 좋게도 내가 그동안 받았던 사랑을 - 나도 응당 결핍이 있다. 아마도 이 세상의 누구나가 어느 한 구석은 그럴 것이다만. - 그녀들에게 모두 퍼부어 주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녀들의 삶을 구원할 수 없는, 그럴 능력이 주어지지 않은 그저 한낱 인간일 뿐이니까.
결국엔 우리들의 사이는, 어느 순간부터 누구의 잘못인지도 모르게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녀들은 그 엉망진창이 모두 나의 잘못이라고 했다. 자신의 그 부족함을 알면서도 헤아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데, 어찌 그걸 해주지 못하냐고 성을 냈다. 왜 애정결핍이 있는 내게, 더 애정을 주지 못하냐고 소리쳤다. 왜 항상 사랑이 부족하냐고 했다.
부족함을 모르지 않았다. 알게 되었고, 헤아리려 노력했고, 정말 오만하게도 한때는 내가 그녀들을 어떻게든 ‘구원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순전히 착각이었다. 다만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오만함을 일찌감치 버리지 못한, 나의 패착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랑 속에선, ‘을’인 사람이 언제나 끔찍한 지옥 속에 산다. 을의 24시간은 오로지 너로 채워져 있는데, 왜 갑인 너의 24시간은 나로 채워지지 않았냐며 울고 징징거리게 된다. 불안하고, 입이 쓰다. 괴롭고 공허하다. 을의 사랑은, 언제나 억울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을의 잘못만은 아니다. 서두에도 말했듯, 애정결핍이 당사자의 ‘잘못’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려서 사랑을 못받은 것이 왜, 어째서 나의 잘못인가. 토로하고 항변할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모두가 평생 항변만 하는데에 온 에너지를 쏟아가며 살아가진 않는다. 또한 모두에게 주어진 24시간, 365일을 ‘너’가 아닌 ‘나’로도 채울 줄 아는 ‘능동적인 을’이라면, 결핍, 그 후의 모든 이야기는 다르게 적힌다.
나의 ‘애정결핍 인간형’의 방점은 여기에 찍힌다.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나 결핍이 있다. 나도 한없이 부족한 존재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저마다의 가시가 있고, 찢긴 상처도 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가리고 싶은 흉터도 있다. 단언한다. 없는 사람은 없다. 인생이란게 원래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충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생’이란 글을 어떤 주제로 어디서 시작해서, 언제까지 끌고 갈지는 오롯이 ‘작가’의 몫이나 다름 아니다. 3장에서 서둘러 덮어도, 아예 쓰지 않아도, 대하소설로 끌고 가도, 40장을 훌쩍 건너뛰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도, 편집자가 아닌 이상 누구도 그 작가에게 이야기를 다시 쓰라 할 자격은 없다. 안타깝게도 내 인생은, 나를 제외하곤 퇴고해 줄 사람이 없다.
다시 쓸 수도 없다. 읽히는 순간, 그것은 이미 쓰여진 책이다. 서서히 번져가던 잉크는 말랐고, 작가는 이미 ‘결핍’으로 장을 마쳤다. ‘개정판’이 나오지 않는 이상, 리콜은 없다. 단, 대하소설로 이어지는 결핍과 고통의 이야기를 독자로 하여금 끝까지 집중해 읽게 하려면, 독자에게 숨쉴 여지를 줘야 한다. 결핍의 플롯을 계속 꼬아 이어가면, 독자는 쉽게 지쳐서 언젠가 책을 덮게 된다. 결국 ‘안 팔린 책을 쓴 작가’는 혹독한 서평만 듣는 ‘을’로 전락하고 만다. 쉬이 읽히지 않음으로, 또 다시 더 큰 결핍이 시작된다. 그 결핍의 지옥은 아마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지옥에서 ‘을’은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애정결핍 인간형에서 도망쳐라. 그것도 아주 멀리. 결코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품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결핍은 또 다른 결핍을 부를 뿐이다. 오만한 생각으로 품에 끌어안지 마라. 뜨겁게 데이고 지쳐 결국 나가 떨어지게 된다. 애처롭게 생각할 수 있다. 안타까운 일임에 분명하다. 다만 그게 끝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이상으로 발을 깊게 들여 놓는 순간, 애써 끌어 안았던 걸 토하지 못해 숨이 막히는 것 또한 모두 내 책임이다.
애정결핍 인간형인 가해자에게 쓴다. 감히.
나를 들여다 보라. 자주, 자세히, 그리고 오래도록. 그리고 괴롭더라도 언젠가 인정하면 된다. "아, 나의 이 모습은 ‘결핍’에서 오는 것이로구나"라고 말이다. 그리고 때가 되어 적당히 채우는 방법을 찾자. 수분이 부족하면 물을 먹고, 힘이 딸리면 밥을 먹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적당히'다. 그저께부터 굶었다고 해서, 오늘 저녁 아홉끼를 먹는 사람은 반드시 탈이 난다. 어제부터 갈증이 났다고 해서 물을 10리터 들이켰다간 수분 중독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배고플 때 누군가 밥을 사주면 나도 꼭 밥을 사자. 누군가 물을 사준다면, 나도 언젠가 물을 사주자. 그 어느 누구도 내게 평생 밥을 사줄 순 없다. 그럼 언젠가 '고약하고 바라기만 하는' 내게 정이 떨어지게 된다. 나를 들여다 보자. 자주, 자세히, 그리고 오래도록. 그리고 인정하자. 그리고 덮자. 그 장을 잘 마무리하고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래야만 결핍의 피해자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고, 충전의 가해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애정결핍 인간형의 피해자에게 쓴다. 감히.
지금 바로 인정하자. 우리 모두는 누구나 부족한 존재며, 절대로 남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절대신이 아니기에, 누군가에게 신적인 존재가 되려는 생각은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의 애정결핍을 본인이 채워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엄청난 오만이자 자기 기만이다. 내가 남을 채워 줄 수 있다는 그 ‘당당함’이 ‘답답함’으로 변질되는 순간이 오면, 이미 때는 늦는다.
한때 상냥하고 너그러웠던 내가, 끝도 없이 퍼주면서도 ‘더 이상 퍼 줄수 없어’서 남을 불행하게 만든 ‘가해자’가 되어 버리는 지옥에, 애초에 발을 담그겠단 그 선택 자체가 오만이다. 애정결핍 때문에 당신을 지옥 속에 가두려는 사람에게서 도망쳐라. 그것도 아주 멀리.
결국 인생이란 그렇듯,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 구원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할지, 영원히 내버려 둘지는 순전히 구원자인 본인의 능력과 선택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