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큼 너도 못났다. ‘응당’ 나도 너만큼 못났으리라.
자격지심(自激之心). 사전 그대로는 '어떤 일을 해놓고 스스로 모자라거나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뜻한다. 애정결핍형 인간형만큼, 자격지심형 인간형이 상대하기 힘든 이유는, 그 자격지심의 부정적인 에너지가 속된말로 타인의 '기를 쪽쪽 빨아먹는다'는 데에 있다. 자격지심 인간형을 상대해야 하는 우리 '보통의 존재'들은, 자격지심 인간형의 결핍과 열등감을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해줄 것을 '요구받게' 되는데, 보통 과도한 존중, 선을 넘는 위로, 끝없는 격려, 지나칠 정도의 조언과 관섭을 요구하는 자격지심 인간형들의 '당위' 때문에 서서히 시들어간다. 자격지심, 또 유사한 열등감, 지나친 자기비하, 애정결핍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결국은 '자존감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고,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애꿎은 타인에게서 본인에게 없는 존중과 위로를 지나치게 요구해, 상대를 서서히 말라죽여 버리는 것이다.
자격지심형 인간형에게서 도망쳐야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은근히 숨겨져 있는 '가시'와 '발톱' 때문이다. 이들은 때론 '겸손'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데, 때문에 주위에서는 보통 이런 사람들의 '기를 북돋워주어야' 한다. 문제는 이게 다른 사람에게 너무나 피곤한 일이란 점이다. 응원해주고 북돋워주는 것도 정말 한두번이지, 섣불리 자격지심형 인간형에게 발을 들여 놓고 있다가는 언젠가 '기가 모두 빨려서' 탈진해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자격지심형 인간들은 쉽게 성을 낸다. 자신의 못난 점을 드러내지 않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나름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가면과 방패가 있어야 하는데, 이 가면과 방패가 보통 견고하지 못하다. 마치 '덫'을 만들어 놓고 '자신을 무시하도록 방치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미끼'로 꾀어낸 다음, 상대가 그 미끼를 무는 순간 '것봐 너 나 무시했지'하며 폭발해 버린다. 공격의 형태로는 할퀴고, 물어뜯고, 반항하곤 하며, 수비의 형태로는 철저한 희생양 놀이를 시작한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상대를 패닉으로 몰아 부친다.
'위로'와 '격려'라는 이름으로 자격지심형 인간형에게 조언을 주고 힘을 북돋워주는 보통사람들은, 처음엔 애잔한 마음을 갖기 마련이다. '아, 왜 저렇게 자신감이 없을까', '내가 옆에서 용기를 준다면 달라질 수 있을거야'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물론 그 생각이 매우 허황되다는 사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지쳐가다가, 언젠가 자격지심형 인간형을 떠나고 싶어할 때가 온다는 거다. 하지만 자격지심형 인간형이 쳐놓은 덫은 너무나 많고 쌓여서, 그동안 퍼주고 퍼주다가 떠나가는 '착한 사람'들이 '넌 날 무시했고, 날 버렸어'라는 어처구니 없는 비난을 받고 상처를 입게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게 바로 자격지심형 인간형이 숨기고 있는 '가시'자 '발톱'이다. 언제고 이를 꺼내서 타인을 해할지 모르기에 위험하고 황당하다. 보통 커뮤니티 속에서의 자격지심형 인간형은, 보호본능을 일으키거나 약자의 아우라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에, 결국 주변의 선량한 피해자들은 그 가시와 발톱에 상처를 입고도 그 사람을 쉽게 떠날 수가 없다. 그저 사랑을 주려고, 격려를 보내려고 했던 사람이 역설적으로는 더 나쁜 사람이 되는 아이러니. 시쳇말로 '벙찌게' 되는데,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내상을 크게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자격지심형 인간형에게서 하루 속히 도망치는 건, 당연히 더 나은 인생을 위한 플랜A다.
자격지심을 가진 A씨. A는 습관처럼 자기를 항상 낮추어 얘기하곤 했다. 처음엔 그게 마냥 겸손한 모양새로만 보여서 '아, 이 사람은 참 가정 교육을 잘 받았나보다'라고만 생각했다. A를 보면 항상 '사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저리 겸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A의 모습은 자존감을 토대로 한 겸손의 미덕이 아니라, 자신을 짓밟고 상처내는 낮추는 방식으로 오히려 사랑과 존중을 구걸하는 빈 깡통 같은 애정결핍 덩어리나 다름 없었다.
'아까 내 발표는 엉망이었어, 니가 보기에도 그랬지?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겠어'
'난 정말 최악이야.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우습게 봤을까?'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 그냥 불쌍해서 친절을 베푸는 것 뿐일거야'
주변에서 어쩌면 흔히 듣는 말들일 것이다. 다만, 이 말들은 아래와 같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어서 무척 위험하다.
'아까 내 발표는 엉망이었어, 니가 보기에도 그랬지?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겠어'.
: 제발 내 발표가 엉망이 아니었다고 말해줘. 안 그럼 짜증나서 미쳐버릴 것 같아. 불안하고 신경질 난단 말이야. 너도 내 발표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충분히 들었잖아.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잠도 설쳤단 말이야. 그래도 내가 우스워? 내 상황이 이해가 안돼? 너 나한테 왜 그래?
'난 정말 최악이야. 정말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우습게 봤을까? 아 부끄럽다'
: 설마 너도 지금 혹시 나를 우습게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정말 가만 있지 않을거야.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 그냥 불쌍해서 친절을 베푸는 것 뿐일거야'
: 너도 나를 설마 불쌍해서 좋아해주는 거야? 이 위선자 같은 놈. 어서 진심으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 안 그럼 너도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쓰레기 위선자로 만들어 버릴테니까.
자격지심을 가진 B는 겉으로는 정말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다. 타인을 배려할 줄도 알며, 언제나 성실해 보이고, 항상 입버릇처럼 목소리를 키워 얘기하는 가치관들마저도 칭찬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속을 깊게 들여다보면, 그건 B가 평생을 거쳐 가다듬어온 자기방어적 포장방식에 지나지 않았다. 빈껍데기일 뿐인 허상.
그는 사실 지나치게 자신감이 없으며, 지독한 애정결핍을 갖고 있었고, 그러기에 항상 질투가 많았다. 모두가 자신을 추켜세우고 '애정해' 주었으면 했던 B는, 성인이 되어서도 시쳇말로 자주 '삐쳐서' 말수가 적어지곤 했으며, 걸핏하면 '식욕이 없다'거나 '컨디션이 안 좋다'는 말로 주위의 관심을 끌길 원했다. 때론 자신의 못난 모습과 속내가 드러나 타인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두려워 남을 먼저 떠나버리는 '비겁함', 또는 남을 무시하는 '오만함'으로 자기방어를 하곤했다. 상대를 꼼짝 못하도록 무시해 버리면, 애초에 상대가 기를 펴지 못하기 때문에 혹에나 감히 자신을 무시하진 못할거라 판단했던 것이다.
B는 결핍을 인정받는 한가지 방법으로, 남들이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어려운 주제에 대한 상식들을 신문, 뉴스 등을 통해 잔뜩 쌓아 놓았다가, 주변 사람 모두가 유쾌한 대화를 하고 있는 도중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칼로 무자르듯 끊고 우월함을 뽐내거나 어색한 침묵을 만들곤 했다. 그 '알량한 지식'으로 사람들에게서 '존중'과 '인정'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오판이었다. 사람들은 B의 지식에도, B라는 인간에게도 흥미를 잃어갔다.
B는 역설적으로, 자신에게 흠집조차 내지 못할 작은 일에도 뿌리 뽑힌 나무처럼 흔들리곤 했다. 그렇게 오만방자함으로 포장된 사람이, 속내가 드러난 순간엔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다. B에게는 마치 그건 '절망의 스카이다이빙'이나, '좌절의 번지점프' 같은 것이었다. 무너지는 순간마다 B가 내뱉은 말이라고는 고작, '그래, 난 원래 이런 못난 사람이야', '너도 원래 알고 있었잖아, 아니야?', '니가 날 버려도 할말없어. 사실 난 그런 대접을 받아도 싸'였다. 얼마나 한심하고 애처로운가. 모두를 무시하고, 억압된 존중으로 자신의 자격지심을 숨겨왔던 B는 결국 외톨이가 되었다. B를 제대로 알게 된 모든 사람은, 모두 B를 떠났다. 어찌보면 꽤 당연한 결과다.
다시 잠깐, A의 대화법으로 돌아가 보자.
**
'아까 내 발표는 엉망이었어, 니가 보기에도 그랬지?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겠어'.
'난 정말 최악이야. 정말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우습게 봤을까? 아 부끄럽다'
'나 같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어. 그냥 불쌍해서 친절을 베푸는 것 뿐일거야'
**
A가 가진 사고 방식의 문제는, 성장과 자립, 그리고 자아 존중을 위한 모든 기준이 '내게는 없다'는 것이다. 내 발표가 괜찮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내가 우습지 않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나를 좋아한다고, 나는 불쌍하지 않다고, 나는 매력있다고 들어야만 바로 설 수 있는 사람, 그게 지나친 사람, 이게 바로 자격지심 인간형의 핵심 특질이다. 그러나 이래서는 정말이지, '살 수가 없다'.
타인의 끝없는 인정, 애정, 위로, 격려, 이런 것들이 없이는 자립이 안되는데, 어떻게 이 외롭고도 험한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또한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가시와 발톱으로 주변 사람들을 할퀴고 물어 뜯는다면, 자격지심 인간형의 악순환은 절대 끝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격지심형 인간형에게서 도망쳐야 한다. 그것도 아주 멀리.
단언하건데, 사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진짜 가끔은 놀라게 될 정도로 없기도 하지만,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스럽다. 보통 사람들이 타인에게 갖는 관심의 유일한 이유는, 애정과 사랑이 아니라면 그것이 '내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건강한 자아성찰과 자기계발, 자아존중감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사람들은 사실, 그저 자기 인생을 온전히 살아내기에도 바쁘다. 그들은 활력이 넘치며,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를 확률도 적다. 자신감을 바탕으로 나날이 한걸음씩 더 성장한다. '나'라는 알맹이가 여물고 꽉 차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줄 마음의 여유도 있다.
반면, 자격지심형 인간형은 타인에게 관심이 무척 많다. 자존감이 없고, 가치관도 확립되지 않아 그저 남이 어떻게 사나 들여다보며 평생 두리번두리번, 허우적대며 살아야만 '사는 것마냥' 살수 있다. 뭔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싶어 한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타인에게서 기준을 찾음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못난 구석을 꼭 집어내야지만, 자신의 못난 구석이 메워진다고 착각한다. 시종일관 자신의 못난 구석이 들킬까 걱정되어 화살을 타인으로 돌려야만하는 인생은 얼마나 피폐하고 메마른가.
인간은 숨을 거둘때까지 마냥 미혹하고 어리석은 존재인지라, 평생을 자기 자신만 제대로 파악하기에도 언제나 부족하다. 그런데도 스스로를 챙기고 돌아 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은 큰 어리석음이며, 타인의 삶에만 - 때론 '고소하다', '배가 아프다' 등으로 표현되는 - 눈과 귀를 기울이고 산다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해와 존중도 없이, 컴컴한 어둠 속에 살다가게 될 것이다. 남의 인생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는 것은 사실, 타인의 삶을 자신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알량한 위안과 자신감을 얻으려는 '못난 마음'으로 밖에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함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애정, 공동체 의식, 배려가 아니라, '타인의 기준 속에서 나를 만들어내느라 허덕이는 관심'이라면, 그런 '쓸데없는 더듬이'는 이제 좀 잘라버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우리나라, a.k.a. '헬조선'에 특히 이런 '자격지심형 인간형'이 더욱 많다고 느낀다. 바로 '나를 판단하고 나를 바로세우는 잣대'를 내 스스로의 고민에서 끌어내지 못하고 남에게서 찾는, 이른바 '종특(종족특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지 않고 남만 보고' 산다. 내 가치관, 내 주관, 의견을 세우지 못하고, 무수한 타인의 기준을 따라가기 바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는 '마땅히', '응당', '반드시', '절대로', '꼭'과 같은 100% 절대 명제가 너무나 난립하는 세상이다. 사회 전체가 별달리 유연하지 못하다. 극단적이다. 냉탕과 온탕을 반복한다. 그것도 자기 기준 없이.
정의, 선, 예의, 도덕 같은 것들에 천착하지 못하고, 오히려 '30대라면 반듯한 직장이 있어야 하지', '40대라면 집 한채는 있어야 하지', '50대라면 적어도 중형차 이상은 몰아야 하지'와 같은, '병맛'같은 기준에 매달린다. 왜 내가 진정 가고 싶은 곳을 여행하지 않고, 남들이 알려준 '여행해야 하는 곳에' 가서 인증샷을 찍느라 목을 매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부모라면 반드시', '자식이라면 응당', '니가 날 사랑한다면', '학생은 절대로', '아버지로서 당신은 꼭' 등에 집착하며 산다. 애처롭다. 애잔하다. 세상 모든 것에 당위를 들이대면, 그 누구도 숨이 막혀 살수가 없다. 그러기엔 뻔히 돌아가지 않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들도 이미 살면서 여러번 겪어봤지 않았는가.
서두에서 '어떤 일을 해놓고 스스로 모자라거나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자격지심이라고 풀었다. 스스로의 기준에 맞게 최선을 다했다면, 그냥 거기서 끝내자. 제발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도 알아야 된다. 도무지 모르겠다면 배우고 연습하라. '사랑받지 못해서'라고 남탓하지 말고 '내가 먼저 나를 사랑해'주면 된다. 남들이 뭐라고 하는 기준에 맞게 사는 세상은 일찌기 종말했다. 내가 믿기로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 대부분은 이미 그렇게 살지 않고 있다. YOLO, 소확행, 비혼, 개성 사회 등, 모두 자신감, 자존감, 굳은 심지 등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열등감, 지나친 자기비하, 애정결핍에서 벗어나 자신을 믿고 나아가라.
진짜 용기있는 사람은 자신의 못난점을 드러낼 줄도 안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렇거니와 다른 사람도 모두 못난점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못난 점이 있어도 나는 충분히 사랑받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못난 점이 있는데, 왜 나의 못난 점만 비난받아야 하며, 나는 장점을 무수히 많이 가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몇몇 못난 점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하는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못난 점을 드러내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 남들이라고 다 있는 못난 점이 자신에게만 없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고칠 수 있는 못난 점은 고치면 되는 것이며,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면 끌어 안고 보다듬어 주면 된다. 중요한 건, 그건 정말 자기밖에 할 수 없다.
자존감은 말 그대로 '자아존중감'이다. '자아(自我)'를 존중하는 감각을 길러라. '자아 존중'을 왜 남에게서 찾나. 스스로, 자기가 해야 한다. 내가 못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은, 타인 역시 못난 점을 가진 완벽하지 못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사랑해 줄 수 있단 것을 뜻한다. 결국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한 인간 관계에서 발현되는 '일종의 사회적, 공감적 동의'를 기반으로 성립된다. 따라서 절대로 혼자가 우리 모두는 저마다 못난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여야 함을 명심하라. 나만큼 너도 못났다. '응당' 너만큼, 나도 못났으리라.
진짜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자격지심으로 똘똘뭉쳐 헤어나오지 못하고 상대를 괴롭히는 사람이 '감지된다면' 서둘러 발 빼고 도망쳐라. 그것도 아주 멀리. 정말이지 너무 못나서 봐줄수가 없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