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非)꼰대, 무(無)꼰대의 명랑 사회를 위하여.
내가 누군가를 만나서 '내가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 유형'이 첫째, 애정결핍형, 둘째, 자격지심형, 셋째, 자수성가형이라고 얘기하면, 언제나 듣는 질문이 바로 이거다. "자수성가가 왜?" 맞다. 자수성가는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해석할 때, '제 손으로 도움 없이 큰일을 성취해낸 사람'이란 뜻이다. 물론 훌륭하다. 이 험하고 지난한 세상에서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존경받아 마땅한 부분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런 자수성가형 인간형을 롤모델로 삼겠다고 얘기할 이유도 충분하고도 남겠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자수성가형 인간형'의 비극적 측면은 '스스로, 물려받은 것 없이, 남의 큰 도움 없이 무언가를 이뤄낸 사람'이, 혹독했던 자기만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가 지금껏 이룬 방법론을 '남에게 무작정 강요'하기 시작하는데서 출발한다. 이들은 보통 '나도 했는데 왜 너는 못해?' 혹은 '나때는 더 심했는데 왜 너는?'으로 귀결되는 '무시무시한' 프레임을 갖고 있어서, 상대방의 상황이 자기와는 다르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툭하면 끝없는 자기 예찬론을 두꺼운 주삿바늘로 주입시키려고 든다. 판만 벌어지면 자기 얘기를 시작한다. "이야, 우리 땐 말이야".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사실 뭐 맞는 얘긴 거 같긴 한데, 상대방은 묘하게 의기소침해지고, 답답함을 느끼며, 심지어 끝없는 대화 끝에 좌절하기도 한다. '좋은 얘길 듣고 왜 좌절해? 에이 무슨 소리야. 너도 할 수 있어.'라는 도돌이표를 다시 꺼내들 작정이라면, 당신은 이미 '자수성가형 인간형'이 가진 비극의 프레임을 탑재한 사람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이런 사람을 요즘에는 '꼰대'라고 하지 아마. '꼰대'는 사실 '늙은이', '아버지', 또는 '선생'등을 일컫는 은어라고 알려져 있고 사실 그다지 예쁜 말도 아니지만, 이보다 이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할 대체어가 없으니, 이 글에선 너그럽게 '꼰대'를 그대로 쓰도록 한다.
[ 꼰대의 외나무다리 ]
자수성가형 A 씨, 그는 유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했다. 자라는 과정에서 학교를 몇 번 중퇴할 뻔했으나, 가까스로 그러지 않았고, 그렇게 노력한 끝에 나름 좋은 국립대학에도 입학했다. 죽을힘을 쓰며 공부한 끝에 남들이 붙기 힘든 시험에도 합격했으며, 그 후론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사업을 일으켜 많은 돈도 벌었다. 남들의 도움 없이 이뤄낸 이런 결과물들 덕에, 그는 자기가 살아온 방식과 태도에 어마어마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누구나 자기처럼 죽도록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는데 왜 그렇지 못하는지 너무 의아하고 안쓰러웠다. 자기는 돈도 없었고, 소위 말하는 ‘빽’도 없었고, 배가 고파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냈는데 너는 왜 못하는가? 어떻게 그렇게 큰 성공을 하게 되었는지 묻는 친구들이나 젊은이들이 있을 때마다 '이를 악물고 나처럼 해봐'라고 얘기했지만, 도무지 먹히질 않는 것 같았다. '에이, 그래 내 말 안 듣고 그렇게 평생 실패자로 살아라. 죽어도 나처럼은 못될걸'. 그는 그렇게 모든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와의 대화 끝에 사람들은 '꼰대'랑 대화를 못하겠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어느샌가 그와 마주 앉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함께 하는 그 자리 자체가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자수성가형 인간형 B 씨. 그는 소싯적, 우수사원으로 이름을 날렸었다. 나름 친화적이고 풍부한 언변을 가진 B 씨는 그래서 젊은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두고 이제 유명기업의 임원이 되었다. 다만, 어느새 부턴가가 나이가 들고,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자 그는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은 매번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고, 최첨단의 업무 방식을 사용하는 그네들의 속도감 때문에, 때로 B 씨는 이러다 자기만 저 뒤로 뒤쳐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왠지 모를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만의 성을 더 견고하게 쌓아야만 아무도 자기를 우습게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젊은 사람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를 하고, 자기가 그동안 얼마나 입지전적인 공을 세웠는지를 '무한반복'으로 얘기하고, 더 좋은 아이디어나 의견이 소위 '아랫사람'에게 나올라치면, 마치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만 같아 입을 틀어막도록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해줄 수 있는 좋은 의견도 B 씨는 이내 묵살해버렸다. 그걸 인정해 주는 순간, 자기가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B씨도 안다. 지금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보일 수 있는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러지 않으면 내가 초라해서 미쳐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B 씨는 그렇게 어느새, 모두가 싫어하는 '공공의 적'이자 '슈퍼 꼰대'가 되어버렸다.
아니 그럼, 왜 이런 꼰대가 이토록 '양산'되는가. 나름 '꼰대가 되지 말자'라는 자체 경보기를 달고 있는 사람으로서 - 물론 누군가 이런 나라도 꼰대라고 일컫는다면 또 할 말은 없겠지만 - 내가 생각하는 주된 이유는, 첫째, 세월을 겪으며 슬그머니 자리 잡는 비이성적 자기 확신, 둘째, 타인을 헤아리지 못하는 공감 능력의 부재, 셋째, 오히려 경험이 적음으로 인해 생기는 편협한 사고방식, 마지막으로 세상이 자기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말 그대로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의 절묘한 화학작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케미'도 이런 형편없는 '케미'가 없다.
내가 살면서 겪는 다양한 일들은 정말 우리를 둘러싼 엄청난 시공간, 그 속의 작용, 반작용 등을 생각하면 채 티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허나, 꼰대들은 세월을 오래 겪으면서 여러 번에 걸쳐 유사한 일을 겪으며 '것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 너 지금 그래서 나한테 이러는구나' 등의 반복적, 선험적인 확신을 갖기 시작한다. 그 확신이 적용이 돼야 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분명 있는데, 꼰대들은 그 확신을 남에게 주입시키려고 든다. 비극의 서막.
거기에 타인의 감정과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꼰대에게는 그 비극의 파장이란 것이 급속도로 증폭된다. 게다가 '내가 마치 모든 것을 겪었다'라는 생각이 확고해지면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야, 내가 말이야~"를 '설파'하기 일쑤가 된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한낱 이 큰 세상 속의 일부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온 우주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 그야말로 '화룡점정'의 피날레를 완성시킨다. '전지적 꼰대 시점'의 종막. 그러니 걸핏하면 '나 때는 말이야', '요즘 애들은 말이야', '왜 취업을 못해', '왜 결혼을 못해', '왜 끈기가 없어', '왜 도전을 하지 않아'라는 말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것이다!!!!!!!!!!!!! 아, 쓰다 보니까 뭔가 열이 받는다. 워워.
그럼 '꼰대 경보기'를 장착하고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고자 하는 내 생각은 무엇인지, 역설적으로 '꼰대'처럼 풀어보겠다. '새겨듣자'. (에휴)
첫째, 사람은 되도록 나이가 들수록 말을 줄여야 한다. 말이 많아지는 것만큼 속 빈 강정처럼 보이는 것도 없으며, 듣는 사람은 쉽게 피곤함을 느낀다. 흔히 '화자'가 더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입을 다물고 들어주는 '청자'의 역할이 몇 배는 더 어렵다. 원체 성격적으로 의기소침하거나 과묵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자신에 대해 더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이 더 쉽게 공기를 장악하게 되므로. '나이가 들면 입보다 지갑을 더 자주 열어야 환영받는다'라는 말도 있다. 술 사주고, 밥 사주면서 주입식 교육하지 말고, 그저 들어주고, 공감해주자. 진짜 훨씬 멋있다. '자기 돈 내고 인생 강의'하는 건 정말이지 멋없는 짓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자 당신에게 돈을 주고 돗자리 깔아줄 때 말하는 게 진짜 쿨하다.
둘째, 굳이 상대방에게 요청받지 않은 조언과 설교는 깔끔히, 고이 접어두자. 매번 남 신경 쓰느라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는 것도 우습고 가볍지만, 반대로 상대가 물어보지도 않은 듣기 싫어하는 말까지 '주야장천'하는 것은 정말 고역이자 고문이다. 물론 상대가 듣기 싫어한다는 것도 모르니까 계속 얘기하겠지...... 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말을 줄여야 한다. 당신의 말이 더 많아질수록, 사람은 적어진다.
셋째, 이미 살아본 인생이라고 남의 인생까지 쉽게 얘기하지 마라. 인생에 변수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당신은 그저 당신의 '외길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제 아무리 많은 경험을 하고 느껴봤다 할지라도, 그건 그저 당신만의 '외길'이었을 뿐이다. 심지어 상대방은 당신이 살아온 그 '외길' 인생 중, 짧게는 십수 년, 혹은 길게 수십 년의 구간을 동행하지 않았다. 같은 길을 걸어도 보는 건 다 다르다. 언덕을 보는 사람, 흙길을 보는 사람, 폭포를 보는 사람. 혹은 뒤를 보는 사람. 그렇게 동시대를 살아도 각자 다른 삶이, 어떻게 다른 시대에서까지 같을 수 있겠는가. 당신이 배고팠다고 해서 나도 배고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처럼 눈물 젖은 빵을 먹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왜 억지로 그 빵을 먹으며 살아야 하는가. 먹길 원하는가? 그거 진짜 억하심정이자 놀부심보다.
넷째, 인간은 원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죽을 때까지 죽도록 노력해야 '조금 덜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신기하게도 다 안다고 착각할수록 점점 더 모르게 된다. 어제의 '부족한 나'에서 오늘의 '덜 부족한 나' 정도만 돼도 하루하루가 성공이다. 자기가 믿는 대로 생각하고 싶어 하는 '확증편향', 몇 번의 얕은 경험으로 탑을 쌓아 올리는 '자기 확신'이 깊어질수록, 삶은 더 위험해진다. 정말 많은 책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읽으면 읽을수록, 신기하게 사람은 더 작아지고 겸손해진다. '아, 정말 내가 모르던 게 이렇게 많았나'라는 생각 때문에, 뭘 안다고 더 말하기도 힘들어지는 게 사실이다. 당신은 당신만의 '무지의 동굴에서 이제 막 랜턴을 켰을 뿐'이다.
그래, 결국 공감이다. 공감 능력만큼 현대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도 없을 거다. 앞으로는 점점 더 이 '공감 능력'이 없이는 성공하기 힘든 세상이 올 것이다. 멀게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딱 열흘만 되돌아보자. 지난 열흘 동안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실검 순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들의 작태를 보라. 그들에게 '공감'이나 '역지사지'란 키워드는 없다. '성추행, 성폭력'의 후안무치한 주인공들, "애들이 뭘 몰라서.."라며 '자원봉사자에게 던진 막말' 파문,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폭언과 무시를 일삼는' 정신 빠진 사람들, 아프다는 사람을 방에 두고 '방이 달라 사과할 기회가 없었다'며, 기자회견에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한 '팀이 아닌' 팀원들. 이들에게 어디 공감이나 역지사지라는 키워드가 가당키나 한가.
물건을 대충 만들어만 놔도 없어서 못 팔던 시대는 끝났다. 고객들은 이제 너무나 똑똑해지고 현명해져서 잘 만들어도 안 산다. 알 거 다 알고, 그만큼 할거 다 한다. 당신이 만든 '당신의 인생'이라는 '아주 작은 상품'을 원치 않는 고객에게 억지로 팔려고 하지 마라. 그냥 그건 당신 소유다. 고객이 정말 궁금하다고 물어보면 그때 설명해라. '관심 없다'는데 끝없이 말하는 호객꾼, 영업사원, 텔레마케터처럼 성가신 것도 없지 않은가. 당신도 싫으면서, 왜 끝없이 말하려 하는가.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방식을 주입하려 한다면, 불도저, 독불장군, 비매너, 개짜증 등 화려하고 ‘싼티’ 나는 수식어들과 함께 결국 '꼰대' 소리밖에 들을 수 없다.
'나 때는 말이야' 하지 말자. 안 물어봤다. "그때는 어땠어요?"라고 물어보면 그때 조심스럽게 얘기하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한다. 말하다 그 분위기에 취해서 일장연설로 바뀌면 그땐 이미 늦었다. '요즘 애들은 말이야' 하지 말자. 당신 입으로 말한 것처럼 요즘 애들은 진짜 '요즘' 애들이다. 모든 게 당신과 다르다. 살아온 환경, 사고방식, 세상의 속도, 풍요와 빈곤, 그들이 경험한 모든 게 전부 다르다. 그렇게 비교할 거면 요즘 애들이 '어유, 꼰대들은 말이야'라고 얘기하더라도 화내지 마라.
'왜 취업을 못해' 묻지 마라. 같이 자소서도 안 써봤으면서. 압박면접도 안 해봤으면서. 우리 땐 '쌍욕'을 해도 상사는 모셨다고?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원래 그건 그러면 안되는 거다. 정신 차려!!!!!!! '왜 결혼을 못해'라고 묻지 마라. 그거 궁금해할 시간에 부디 당신의 배우자, 당신의 결혼 생활에 더욱 충실했으면 좋겠다. 결혼한 사람에게 당신만의 속도로 ‘애는, 둘째는, 셋째는’ 물어보지 마라. 어휴, 정말 콱. '왜 끈기가 없어'라고 하지 마라. '끈기'라는 것의 척도는 모두에게 다르다. '왜 도전을 하지 않아'라고 채근하지 마라.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1도 알지 못하는 남의 인생'에 그렇게 간섭하려고 하지 마라. 그럴 시간에 '당신의 무지의 동굴을 더 탐험하라'.
당신의 '나는 이렇게 했다' 스토리는 그저 세상의 수백, 수천만 가지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겨야 맞다. '너도 이렇게 해라'라고 말하는 일장연설 때문에 상대방이 스트레스와 좌절감, 수치심을 느꼈다면 그건 이미 '꼰대 짓'이다. 제발 우리 모두 '꼰대'는 되지 말자. 진짜 이를 갈며 노력해야 된다. 정신 차리지 않음, 정말 순식간이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굵은소금” ]
이런 인간형에게서 도망가자. 그것도 아주 멀리. 휴대용으로 갖고 다니다가 굵은소금을 뿌려보자. 들어줄 사람이 없어야 말도 안 하겠지. 에휴. 왜 이렇게 이 글은 쓰면서 계속 화가 나는 거지. 돌이켜보자면 왠지 너무 많은 꼰대의 홍수속에 살아왔던 것 같다. 자, 이로써 나의 '이런 사람을 만난 게 된다면'의 3부작 이야기는 끝났다. 이 세가지 글을 쓰는 것도 사실 참 쉽지 않았다. 그 세가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내가 바로 선험적 확신을 가진 '꼰대'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 역시 꼰대가 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혹, 이미 누군가에겐 꼰대일지도. 나도 원체 말이 많고, '썰'이 긴 사람인지라. 아, 그렇지만 내가 이미 꼰대라면, 그럼 너무 슬플 것 같다만.
다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 노력하자. 끝없이 경계하자. 그래야 오래도록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면서 살 수 있다. 향기가 없는 꽃이 되어 길가에 홀로 필지언정, 최소한 고약한 악취를 풍기며 살아가진 말자 이거다. 원래 사람이 제일 모르고 지나치며 사는 게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