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작가 2년, 글로 풀어낸 '타인의 청춘'
브런치를 시작한 건 2년 전이다. 운좋게 작가 심사에 통과됐고, 굳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아끼다 엿 됐다'라는 글을 생일날 처음으로 올렸다. 그리고 곧이어 '명색이 작가라면', 인생의 고난도 다룰 줄 알아야지라는 허세로 '공밍아웃' - 공황장애를 겪는다는 걸 알리는 것-을 했다. 정말 살면서 역대급 페이스북 좋아요를 받았다. 응원이 쏟아졌다. 좀 불쌍했었나 보다. 사실 최초의 글을 굳이 생일에 썼던 건, 타국에서 외롭게 생활한 지 1년이 되던 차에, '나 그럭저럭 잘 살아요'라는 말과 함께 생일 축하를 받고 싶은 유치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 힘든 유튜브 1일 1영상을 한다는 세상에, 1년 동안 고작 40개의 글을 썼다. 이 또한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이지만, 브런치 작가라는 심리적 '완장'을 차고 나니 글을 쉽게 쓸 수가 없었다. '나를 이렇게 드러내도 되는지', '내가 뭘 안다고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등을 판단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글을 쓰기 전까지 머릿속에서 백번을 넘게 퇴고를 하고, 누군가가 반박할 말은 없는지 혼자서 마음속 '썰전'을 벌이느라, 몇 개월 동안 브런치 앱을 열어보지 못한 때도 있었다.
조회수가 높지 않은 글을 바라보는 '작가'의 심경은 뭐랄까. 애쓰는 만큼 '사랑받지 못하고', '공감받지 못하면서'도 '마이크'를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는 무명의 예술가-라는 표현도 내겐 사치겠지만- 같은 느낌이다. 핀 조명이 무대 위 나를 비추고 있는데, 얼굴도 모르는 관객들 앞에서 쭈뼛 거리며 용기내서 어렵사리 말을 시작했는데, 때마침 스피커가 꺼진 기분. 유쾌할리가 없었다.
현지에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주 동안 랑카위에 갔다. 쨍하게 맑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찰나에 나는 무엇을 떠올리고 있나. 이토록 눈부신 순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마음만 졸이고 시간이 흐르는 이 순간에도, 얼굴도 모르는 당신들을 위해 '무수히 많은 퇴고'를 하고 있다는, 보이지도 않는 변명을 혈서로라도 써야 할까. 그게 무슨 소용이라도 있을까.
에이 그냥 뭐든 쓰자. 내가 잘하는 걸 하자. 읽든 말든 쓰자.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그렇게, 또 1년이 지났다. 재밌는 건, 그 후로 1년간 글은 더 줄어들었다. 30개. 그냥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남들 반응 신경 쓰지 말고 쓰자는 다짐을 하고서도 그랬다. 생각을 정리하고, 그동안 무거운 글만 쓰다가, 좀 가벼운 글도 써보자는 마음으로 2주 동안 랑카위에 있었으니, 욕심 같아선 최소한 '랑카위 이야기'가 14개는 나왔어야 하는데, 인생이란 것이 그저 그랬다.
어떤 날은 잔뜩 부푼 마음으로 랩탑을 열게 되지만, 어떤 날은 이야깃거리가 시들고 말라, 아무것도 할 말이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꺼내 놓을 수도 없는 말만 실타래처럼 가득한 날도 있었다. 사실 글로 쓸 그렇다할 일도 없었다. 자그마치 1만 4천 일이 넘는 날을 살고도, 인생은 그냥 그랬다. 1만 가지 정도의 깔깔거릴 일들이 있었으면 좋겠더랬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그 후 1년 사이에 [열한 가지 인생 이야기]라는 나에게만 잔뜩 '거창한' 인생 이야기 매거진만 꾸역꾸역 끝맺게 됐다. 누군가는 공감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왜 이렇게 글이 긴지 불평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첫 번째 단락에서 스와이프를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열자마자 X 버튼을 눌렀겠지만, 그랬다. 그것도 인생이었다.
'나'라는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그런 내가 모든 사람에게 소중한 존재일 수는 없었다. '나를 누군가 사랑해주길 바라면서 기다리기'만 해서는, 내일 아침에도, 모레 아침에도 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요일별 매거진에 피쳐 되는 글들이 가끔은 그렇게 훌륭해 보이지 않는 글도 있는 것 같다는 질투 섞인 마음으로, 대체 이건 왜 나보다 많은 사람이 읽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내게는 '내가 흥미로워하는 글'이나 '내가 썼던 글과 유사한 글'들을 큐레이션으로 보여주는 것일 테지만, 그런 글들의 끝에 다다라, 결국 나보다 훨씬 많은 '구독자수'를 확인하고 나면, '나도 비슷한 글을 더 정성 들여 쓰는데 왜 내 글은 덜 읽힐까', '내 글들은 왜 구독해 보고 싶지 않을까'를 생각했다.
아마도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썩은 이를 확인하기가 무서워 치과에 몇 년 동안 가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이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즐겁지만 반드시 굳은살이 배기고 물집이 잡히는, 이토록 고된 글 씀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게 됐다.
브런치 글쓰기,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였던가
첫째, 브런치는 나를 성장시켰다. '오직 글로만 승부해야 하는' 플랫폼에서 나는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나를 갈아냈다. 생각이 정돈되고, 요란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물론 글을 쓰고 난 뒤 -아주 가끔- 훅훅 올라가는 조회수를 볼 때면, 어김없이 쿵쾅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힐 방법도 딱히 없었다만, 다음 글을 더 잘 써보자는 원동력으로만 삼기로 하고, 또 다른 글 거리를 끝없이 사냥했다.
둘째, 브런치 '작가'라는 타이틀에 목매지 않고, '적어도 읽어봄직한 글'은 써 드리겠다는 마음을 먹고,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굳이 좋아요, 구독은 하지 않을 글이라도, 나의 활자 위에 머물렀던 그 순간, 정보를 얻거나, 문장을 두어 번 더 새겨 읽게 만들 수 있다면 성공한 셈 치자 생각했다. 이 부분에선 꽤나 섬세한 표현을 썼구나, 그럴싸한 은유를 가져왔구나 하는 정도라면,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셋째, 더 읽고, 더 쓰고, 나를 더 고민했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나서,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지, 훌륭한 책들, 자주 읽히는 책들은 어떻게 쓰였는지 알아봤다. 문장을 고치고 다시 보게 됐다. 그리고 요지경 속 프랙털 같은 잔뿌리를 다 잘라내고, 굵직한 줄기만 남겨 매거진을 다시 들여다 보고, 내가 썼던 글을 독자의 입장에서 탐독해 보았다. 이리 뛰고 저리 나는 무책임한 글들을 반성하고, 앞으로 무엇을 큰 줄기로 가져갈 수 있는지를 정했다. -그래서 지금 매거진이 9개로 늘었다. 줄기 맞나(?).-
넷째, '접선이 가능한' 주변 구독자들에게 '내가 그간 잘못한 부분은 없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쿨하게' 인정하고, '앞으로 그렇게 써보겠노라'라고 그 앞에서 말했다. 고맙다 했다. 작은 마음인 나라서, 반은 진심, 반은 억지였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 <스캔들>에서 나온 배용준의 대사 중 '진심인 척 하니 진심이 되더이다'는 말처럼, '이게 내 진심이라'는 생각으로 새로운 글을 써 보기로 했다.
그래서 쓴 글이 바로
'말레이시아가 살기 좋은 10가지 이유'라는 글이었다. 고민하지 않았고, 무겁지 않았고, '인생론'에서 벗어난 첫 글.
그리고 바로 그 글이,
정말 큰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무난한 하루였다. 아마도 조금 지쳐있었나 보다.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꺼내고, 고추장을 듬뿍 넣고, 간단히 볶은 닭고기 요리를 만들어 조금 식은 밥과 함께 비벼 먹었다. 소스를 듬뿍 얹은 샐러드도 먹고, 닭뼈를 발라 입으로 욱여넣느라, 양념이 묻은 손가락으로 40분 동안 썼던 첫 글. 그게 12만 조회수-이렇게 나는 변하지 않는다. 그게 또 무슨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느냐마는-를 넘었다.
다음 메인 페이지에, 여행 섹션에, 유명 카페에, 카카오톡 채널에, 브런치 페이스북 메인에 소개되었다. 그리고 다시 참회하는 마음으로 '말레이시아가 살기 어려운 10가지 이유'를 또 썼다. 좋은 이유만 늘어놓은 나를 다시 통렬히 반성하면서 내 마음 편하자고 '속편'도 썼다. '균형 있게 보세요'라면서.
구독자가 늘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브런치 글 덕에 잡지사 기고를 하게 됐다. 내 글이 쓰인 잡지를 우편으로 받아보았다. 그것도 말레이시아에서. 한국의 집으로도 잡지가 여러 권 배송됐고, 어머니는 내가 다니는 신경정신과 의사님께도 '우리 아들 글이 실렸다', '이제는 유튜브도 한다'며 자랑을 하신 모양이었다. 나중에 상담하다가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요즘 글도 많이 쓰시고, 유튜브도 하신다면서요?"라고 물었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이역만리에서 쓰고 있는 미천한 글이, 어머니를 기분 좋게 할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람 노릇의 의미는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글이 또, 다음 메인 페이지에, 유명 카페에, 카카오톡 채널에, 브런치 페이스북 메인에 소개되었다.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은 사람이 내가 쓴 글 아니냐며 연락을 해왔다. 심지어 글이 널리 퍼지게 되면서, 글을 발췌하거나 도용해 마케팅에 사용하는 곳도 찾아볼 수 있게 됐다. 나 같은 작가의 글을 가지고 당최 '표절'이라니. '도용'이라니.
본격적으로 말레이시아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게 내가 잘할 수 있는 거였다.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지만 애쓰고 공들여 공유하고 싶지 않은 내용 - 나는 글 하나를 쓰는데 보통 서너 시간이 걸린다-, 누군가는 정말 알고 싶지만 도무지 찾기 어려운 내용, 누군가 우연히 알게 된다면 '정말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을 풀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체득한 글을 써 내려가는 건, 내 인생을 빻아 넣는 것보다 어렵진 않았다. 다만, 실제로 경험한 것만 쓰자, 읽는 사람 입장에서 써보자, 읽으면 마음이 후련해질 만한 정보를 써보자는 '제3대 원칙'에만 충실하자고 마음먹고, 쓰고 또 썼다.
그렇게 말레이시아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브런치는 나를 조금 더 성장시켰다.
또 다른 잡지사의 기고 요청을 받았다. 응하지 못했지만 강연 요청도 받았다. 예전에 마케팅 일을 하면서 보도자료를 써본 적은 있다만, 내가 정성 들여 쓴 글을 신문에도 올리게 됐다. 브런치 글을 영상으로 녹이려고 함께 만들었던 유튜브를 보고, 공항에서 날 알아보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리고 나는 브런치 덕분에,
이제 라디오 진행자가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지낸 3년 동안 숱하게 많은 일들을 겪었다. 회사를 차렸고, 회사를 엎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프로젝트를 덮었다. 소송을 위해 변호사를 만나기도 했고, 한때 소중했던 사람과 절교도 하고, 사기도 맞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고, 너무 지쳐서 가족들 앞에서 펑펑 운 적도 있었다.
1만 4천 일을 살고도 끄억 끄억 울어대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젠더 감수성과 1도 연관이 없이-이다. 하지만 그 1만 4천 일의 끝자락, 마지막 '천일동안', 나는 언젠가 고국에 돌아가더라도 '말레이시아 대해 꽤 잘 아는 통이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고, 그 꿈을 갈아 넣어 브런치를 쓰고 또 썼다.
한국에서 말레이시아에 오고 싶어 하는 분들, 사업을 하시는 분들과 숱하게 만났다.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알려 주었다. 누군가 말했다. '왜 그렇게 순진하게, 어린아이처럼 사냐'고. 네가 지금 말하는 그 정보가 다 돈인데, 네가 소개해 준 사람, 이제 너 제쳐두고 내가 직접 연락해도 되는데, 참 인생 바보 같이 산다고.' 그렇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순수하게 도움이 되면 어때. 그게 돈이 아니면 어때. 그러고 싶었다.
그 꿈이, 단지 꿈으로만 남지 않게 만들기 위해, 더 공부하고, 더 묻고, 더 알아보았다. 사실 아직도 나는 말레이시아를 잘 모른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선, 강박이 느껴질 정도로, 이런 마음으로 산다. 30년을 넘게 산, 내 나라에 대해 설명하려해도 진땀을 뺄 때가 있는데, 고작 3년 가지고 전문가? 그건 정말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밤늦게 집에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인도인 기사님께 처음 듣는 얘기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더 알고 싶다. 더 배우고 싶고, 더 이해하고 싶다. 그게 진짜로 내 마음을 '쿵쾅'거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를 소개하는 일이 내게 그토록 설레는 건, '순수하게 말레이시아가 좋아서'도 있지만, '말레이시아'에 관심을 갖는 누군가에게, 구독자에게,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걸고 말레이시아에 오시는 분들에게, 자녀의 행복을 위해 삶을 내던지는 분들에게, 은퇴 후 평온을 찾고 싶어 말레이시아의 문을 두드리시는 분들에게, '그래도 3년의 경험'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하며, 내게는 위안을, 타인에게는 도움을 주길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짐을 잃어버렸는데 영어를 잘 못하셔서 애먹는 분을 돕고 싶고 -도왔다-, 가족과 함께 오는데 자기가 모든 걸 다 알아봐야 해서 너무 걱정이 된다며 쪽지를 보내신 분을 돕고 싶고 -도왔다-, 비행기에서 모르는 현지인에게 이유도 모른 채 다짜고짜 항의를 받는 분들을 지켜주고-도왔다- 싶다. 사람들이 말레이시아에서 '진짜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하게 귀국했으면 좋겠다. 맛있는 커피를 추억으로 떠올렸으면 좋겠다. 정말 좋은 마사지를 받고 피로를 풀었으면 좋겠다. 혹시나 말레이시아에서 힘든 일을 당했더라도, 괜찮다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고 위로해 주고 싶다.
한국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현지인들에게도, 올바른 한국을 알리고 싶다. 성별, 나이도 가리지 않고 나를 '오빠OPPA'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한국은 성형 중독인 나라 아니냐, 자살 공화국 아니냐, 막장 드라마처럼 가족들끼리 서로 죽이고 미워하는 거 아니냐, 한국 사람들은 영어 전혀 못하는 거 아니냐, 독재 국가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한국은 그런 나라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나는 '민간 외교관'이자, '말레이시아 통'이자, '두 나라를 잇는 꽤 근사한 다리'가 되고 싶다.
그렇게 돕는 마음을 브런치에 꾹꾹 눌러썼고, 나를 응원해주시고 '돕는' 구독자 분들께서 미천한 글들을 사랑해 주신 덕분에, 돕는 마음을 펼칠 수 있도록 [ EBS 오디오 천국, 그곳은 어때 말레이시아 ]라는 프로그램에서, 라디오 진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비록 짧은 코너로 진행되지만, 말레이시아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이 유익하게 듣고,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고등학교 시절, 라디오를 너무 좋아해
라디오 PD, 진행자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브런치 덕분에 그 꿈이 이루어졌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난 뒤 2년 만에, 브런치 덕분에 라디오 진행자가 되었다. 7월에는 브런치의 글이, 한 신문의 여행 섹션에 실릴 예정이다. 8월에는 내가 정말 좋아라 하는 작가들이 책을 내곤 하는 출판사의 월간지의 작은 지면에, 말레이시아를 소개하는 글이 실릴 예정이다.
나는 이렇게 브런치를, 쓰고 또 쓸 것이다. 누군가 잠시 공감할 수 있고, 누군가 안심할 수 있고, 누군가 미소 지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7년 전 다니던 회사에서 '소나기'라는 세션이 있었다. '소중한 나의 인생 이야기'라는 '오그라드는 이름'을 가진 코너였는데, 같은 그룹원들끼리 서로 잘 알아가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었고, 내가 그 첫 번째 발표자였다. 그때 마이크에 대고, 나지막이 얘기했던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저는 글 쓰는 걸 정말 좋아합니다.
나중에 꼭 제 책도 내고 싶습니다.
꼭 쓰고 싶어요. 진짜 멋지게 살고 싶거든요.
이미 제목도 정했어요.
2022년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에서
제 책을 꼭 찾아 주세요.
책의 제목은 '타인의 청춘'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브런치 필명은
'타인의 청춘'이다.
7년 전, 나는 내 청춘의 포부를 말했고, 2년 전, 브런치 작가가 됐고, 2년 후 라디오 진행자가 되었다. 물론 본업은 '말레이시아 통으로, 말레이시아에서 선한 영향력을 펼치며 사람들을 돕는, 꿈 많은 대한민국 청년'이고, 그 꿈을 위해 나는 내일도 '나의 청춘'을 불사를 예정이다.
나의 아프고 힘들었던 청춘이, 지금 그대들의 시리고 차가웠던 청춘이, 단 한 순간도 헛되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미래를 더 오래 지켜볼만한' 청춘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나의 청춘'뿐 아니라 '타인의 청춘'도 그렇게 힘을 내볼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 온기도 아직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어서,
오늘도 나는 브런치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