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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Jun 25. 2019

애쓰는 사람의 고마움

go the extra mile , 단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갈 수 있다면

'중년'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소위 '120세 시대'에 중년은 60살이 아닐까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지만-나이에 가까워 오니, 사람이 더 힘들다. 어렸을 땐 사람들이 새하얀 도화지 같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까맣게 칠한 스크래치 그림 같다. 이쑤시개로 아무리 예쁘게 긁어낸다고 하더라도, 예쁜 색깔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생각해 보면 청소년기엔 채 마르지 않은 수채화 같았던 것 같다. 축축이 젖어있는 경계 너머 번져오는 컴컴한 색깔을, 내가 어딘가에라도 기댈 수 있을 '소속감'이라고 착각하고, 그 누구와도 어울리고, 그 누구에게나 인기 있어야 하고, 그 누구에게나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었던 것 같다. 왜 그런 '무작위 어울림'에 그렇게까지 집착했을까.




스무 살이 넘고 나서도 이 수채화 같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항상 약속을 여러 개 잡고, 모두가 중요한 것처럼 행동했다. 다음 약속에 늦었다는 걸 직감하고도 약속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지 못하며 전전긍긍하고, 뒷 만남에서는 늦어서 미안하다며 '내가 밥이나 술을 사겠다'라고 카드를 꺼냈다. 그게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자발적 호구'.


집에 들어와서는 방전된 배터리처럼 탈진해 버렸고, '언제나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사람이 '지긋지긋'해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더 많았다. 이제는 그렇게 숱하게 만나고 고마움을 표시했고, 사과했으며, 미워했고, 다시 만났던 모두가 기억에 남아있질 않다. 하루를 사는 게 '무던히 애쓰는 일'이 되어버려서 그런가, 모임 자체를 만들기 싫고, 나가기가 싫고, '소셜라이징'이 어색하고 숨이 막힌다. 그냥 담담하고 덤덤하게 나를 챙기며, 가끔 외롭더라도 그렇게 조용하게 살고 싶다.


이건 새빨간 거짓말일까.

그래서 이제 내가 조금 알 것 같은 것 단 하나는,


애쓰는 사람의 고마움

나에겐 정말 몇 안 되는 손에 꼽히는, 생각만 해도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의 진짜 매력은 뭐냐면 '애를 쓴다'는 것이다. 그 애를 '어떻게 쓰냐'라고 묻는다면, '정말 남들보다 조금 더 쓴다'는 것.

식당에서 메뉴를 내가 읽을 수 있게 돌려 내어 주는 것. 간간히 헛기침을 하는 걸 보고 말없이 에어컨 세기를 낮춰 주는 것. 진지한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눈빛이 보일 땐, 그저 들어주는 것. 추가로 물어볼 게 뻔한 정보를 애초에 한 번에 세심하게 알려주는 것. 혹시나 짜고 달게 먹고 싶지 않을 수 있으니 간을 따로 할 수 있게 조미료를 따로 내어주는 것. 추운 자리에 앉으면 내가 금세 코를 찔찔 거릴게 뻔하니 손을 뻗어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곳인지를 확인해 주는 것. 내가 처음 가야 할 장소의 주소를 알려줄 때, 주소와, 이미지와, 내비게이션 링크까지 함께 보내주는 것. 혹시나 자기가 마중에 늦을 수 있으니, 도착 5분 전에 알려달라고 확인 문자를 보내 놓는 것. 어려운 중국어나 말레이어를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으니, 꼭 필요한 정보에 굳이 글씨를 써넣어 주는 것. 내가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 내용까지 짧은 순간순간을 찾아내 통역해 주는 것. 이메일에 꼭 읽어야 하는 정보에 밑줄과 컬러 표시를 따로 해주는 것. 혹시나 잠들어 있을 것 같은 시간인데, '너는 원래 잠을 깊게 못 자잖아'라면서 일부러 연락을 안 했다는 것. 혹시나 자기가 전달하는 정보가 틀렸을까 봐 마지막 한번 더 오탈자를 확인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탈자 때문에 상대가 질문을 다시 했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해야 하는 일이 아주 작은 노력이 드는 일이라도 미루지 않고, 상대가 물어보거나 기다리지 않게 배려해주는 것.

서로 오래 보고 잘 알아서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들이 정말 간혹 가다 있다. 진흙밖에 없는 광산에서 튀어나올까 말까 한 금덩어리, 은 덩어리 같은 사람들.


이들에겐 이런 모든 게 몸에 배어 있고, 마음에 적혀 있다. 그냥 행동 하나하나, 말투 하나, 문자 하나로도 '너를 위해서 기꺼이 조금 더 노력하고 있어'를 말없이 보여주는 사람들. 정말 말하기도 소소하지만, 적다 보면 열 줄이 넘어가는 작은 것들, 그렇게 다른 사람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는 extra mile. 나는 이런 사람들이 사랑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성공한다. 세상이 규정하지 않은 길 위에서,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성공하게 되어 있다. 이건 내 평생의 믿음이다.




물론, 내 마음이 혼탁한 날, 이런 사람들을 볼 때면 혹시나 애정결핍이 아닐까, 혹시나 자격지심이 아닐까. 인정받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건가. 그런 몹쓸 의구심을 가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건 그만 두기로 했다. 위에 적은 모든 것들은 사실 '내가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런 노력이 혹시 '애정결핍'일까, '자격지심'일까, '자존감이 낮아서' 그럴까 라고 고민하는 건, 거울 앞에 선 나에게 흙탕물을 뿌리는 일이라 더 이상은 못하겠다.


이러니, 이 모든 것들이 느껴지는 예민한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불편하고 어려울지 뻔하다. 숨 막힐 것이다. 그런데 그냥 이제 '내가 좀 원래 예민하잖아'로 끝내기로 했다. 마침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저건 내가 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뭔가 내 안에서 저절로 돌아가는 '엔진' 같은 것들이다. 저렇게 안 하기가 힘들다. 그렇게 안 하고 이메일의 '전송' 버튼을 누르는 건 내게 끔찍한 일이니까.


몹쓸 완벽주의인가. 모르겠다. 이젠 또 그게 뭐 대수인가 싶다. 지독한 완벽주의를 가진 나라고 생각했는데 해가 갈수록 정말 완벽한 게 없다.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실수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될 때도 있다. 이제 나 같이 실수투성이에 완벽하지도 않은 모자란 사람에게 '내가 완벽주의가 있나 봐'라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기엔, 능력도, 체력도, 의지도 많이 꺾인 것 같다.



결국,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굳이 '애쓰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들도 나같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내가 아끼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이다. 그들도 얼마나 힘들까. 가끔 그들이 내게 말한다.


"너무 애쓰지 마. 이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아."


물론 나도 그들에게 똑같은 말로 응수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웃는다. 마음속에 온화한 열기가 번지는 걸 확인하면서.



서로 이 얘길 나눌 수 있는 진짜 소중한 사람들은, 이미 내가 노력하고 있는 걸 아는 사람들이다. 역시 그들도 그렇게 '애를 쓴다.' 내가 애를 쓰고 있기 때문에 발맞춰 애쓰는 게 아니라, 그들은 원래 나에게 애를 써주었고, 나도 그들에게 애를 써왔으며, 우리의 그런 오랜 '애씀'은 서로를 '애정'하게 만들었다.


그게, 이 나이 먹고서야, 이제야 선명해져서, 사람이 힘들다. 힘들어도 너무 힘들다. 애쓰는 사람만 애정 하기에도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원치 않는 관계 속에서, 색깔 없이 살아가는 삶을 살았던 게 나를 너무 지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최선을 다해야 할 사람에게만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애써본 경험이 있고, 애쓸 줄 아는 사람들은 그걸 바로 알아챈다. 이메일만 봐도 느껴지는 노력과, 정성과, 애씀을 한눈에 알아본다. 그렇게 애쓰는 사람들을 알아주는 사람들에게 애를 쓰면서 살고 싶다. 그게 내가 원하는 인정인가 보다. 성공에의 인정, 승진 욕, 물질적인 욕구, 이런저런 그런 거 말고. 애씀을 알아봐 주는 누군가에게 애쓰는 것. 그게 내가 스스로 정의하는 내가 받고 싶은 '인정'이다. 최근에도 그런 '애를 쓰는 사람'들을 목격할 일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을 알게 되고 느낀 '환희'가 내 인생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며칠간, 나는 무척이나 행복했다.




어쩌면 말레이시아에 와서 마치 무슨 1인 공방처럼 작은 것들을 뚝딱뚝딱거리며,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방송을 하고, 이것저것 작은 일들을 하나하나 해 나가는 것도, 나에겐 버거운 날들일 때가 있다.


"그 나이 됐으면 연봉 얼마에 임원은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같은 말은, 사실 내게 그 어떤 감흥도 주지 않는다. 욕심이 없어서 그렇게 안 사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그런 걸 하고 싶지 않다. 애초에 그런 게 내 꿈이 아니었는데, 니 꿈은 왜 그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최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 사는 내가 대단하지도 않다. 이상하지도 않다. 정상적이지도 않고, 비정상적이지도 않다.




그냥 내일도 뚝딱뚝딱 내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것. 그 애씀도 가끔은 나에게 힘든 일이기 때문에, 그 뚝딱뚝딱 와중에 'go the extra mile', 좀 더 애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 그게 가끔은 버거울 수 있다는 걸 알고 느끼니까. 알면서도 애쓰려는 마음을 갖는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하루를 산다.


그래서 나는 '내게' 애써주는 사람이 너무도 고맙고, 그렇게 나도 '누군가에게' 애쓰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게 내가 유일하게 지금 할 수 있는 '나의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릇의 크기다. 누구에게나 버거울 수 있는 하루에, 누군가 당신에게 조금 '애를 써' 주었다면, 분명 그 사람은 당신에게 '애정을 받을' 당당한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애를 씀으로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다. 그리고 나에게 그렇게 애를 써주는 당신에게 고마움을 말하고 싶다. 그게 문자 한 통이었든, 전화 한 번이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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