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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아 Oct 14. 2019

너무 잘하려 하면 망친다

수능 도시락 망치고 얻은 교훈

나는 4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밥을 한 번도 망쳐본 적이 없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엄마가 가스레인지로 냄비밥 하는 걸 가르쳐주셔서 그 햇수가 나온다.(왜 그리 일찍 가르치셨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


어려서 밥을 할 줄 알았던 것은 여러 에피소드를 낳았는데, 3학년 때는 허언증이 있는(엄마가 가출하셨고 어쩌고... 아마 나의 관심과 동정심을 얻기 위해 그랬던 듯) 친구 집에 가서 저녁밥을 지어주기까지 했다.(밥을 다 해놓았는데 가출했다는 엄마가 장 본 것을 들고 귀가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들통났다.) 4학년 아람단 뒤뜰야영 때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라고 하길래 '우리더러 알아서 밥반찬을 하라고?' 황당해하면서도 코펠 밥을 해놓았더니 그제야 우리 텐트 담당 엄마들이 오셔서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아, 엄마들이 와서 해줄 거라고 진즉 얘길 하지!


그런 내가, 제일 중요한 아이 수능날 도시락 밥을 망친 것이다.


학교에서는 수능과 같은 환경에서 연습하기 위해서 9월, 10월 모의고사 때 도시락을 싸오는 것을 권장한다. 안 싸와도 정상 급식이 이루어지지만, 수능날과 똑같은 환경을 연습하기 위해서다.


나는 이 두 번의 모의고사와 수능 당일날까지 세 번을 모두 똑같은 메뉴로 도시락을 쌌다.


좋아하는 것은 넣고,

싫어하는 것은 빼고,

소화가 잘 되게 부드러운 것,

포만감을 주면서도 졸리게 하지 않는 것,

영양이 금세 머리로 전달될 수 있는 것...


고심 끝에 결정한 9월 모의고사 도시락 메뉴를 아들은 맛있게 잘 먹었다고 했고, 평소 집에서 자주 해 먹는 것이 아니니 한 달에 한 번씩 같은 걸 먹는다고 질리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미 30% 쌀밥, 돼지고기숙주볶음, 치즈야채달걀말이, 볶음김치, 여기에 김과 멸치볶음 같은 밑반찬을 추가했다.(이건 안 망친 모의고사 때 찍은 것)

현미와 현미찹쌀이 30%쯤 들어간 쌀밥, 돼지고기 숙주볶음, 다진 야채와 치즈를 넣은 달걀말이, 볶음김치, 거기에 도시락김과 멸치볶음이나 콩자반 같은 밑반찬을 조금 곁들였다.


아이가 국을 먹지 않지만 뻑뻑할 것 같아서 수분이 많은 숙주를 고기와 볶은 것이고, 김치도 싸지 말라 했지만 칼칼하고 개운한 것이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볶아 넣은 것이다. 생김치보다 냄새도 덜하고 말이다.


드디어 수능 D-1.

시어머님께서 "이왕이면 햅쌀로 해주어라"하고 봉지쌀을 사다 주셨다. 나는 혹시 예민하고 긴장된 상태에서 현미가 껄끄럽게 느껴질까 봐 현미를 초저녁부터 미리 불렸다. 그리고 밥물을 붓는데 평소보다 살짝 물을 더 넣었다. 된밥보다는 소화가 잘 되겠지. 그리고 아침에 시간 맞춰 밥이 되도록 예약 버튼을 누를 때, 평소에는 그냥 '백미'를 누르는데 특별히 시간이 더 걸리는 '잡곡밥' 코스를 선택했다.


아침에는 반찬을 만드느라 분주했다. 밥솥이 칙칙 소리를 내며 취사 중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정성껏 달걀을 말았다. 반찬들도 갓 만든 것을 넣어야 보온도시락이 더 오래 따끈하게 유지되니까 최대한 뜨거운 채로 넣었다. 그리고 밥솥을 열어 다 된 밥을 푸려는데!


밥이 아니라 거의 떡이었다! 

밥솥에서 그런 찐득한 것을 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햅쌀은 일반 쌀보다 수분이 많아 촉촉하다. 나는 그걸 전기밥솥에 넣고 밤새 불린 셈이다. 현미도 초저녁부터 불려서 마찬가지였고. 거기에 전체 밥물을 또 조금 더 했고, 마지막 화룡정점으로 더 많은 조리시간과 압력이 들어가는 조리 코스 세팅까지.


너무 당황스러웠다. 남편과 아들이 그 밥으로 아침을 먹으며 "이건 안 되겠는데", "조금 지네요"라고 했다. 집에는 햇반이 하나 있어서 급한 대로 그걸 섞었다. 그냥 햇반만 데워 넣어줄 걸. 햇반 하나로는 양이 적다고 생각했던가.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햇반이 수분을 좀 가져가 주길 바랬지만 둘은 따로 놀았다. 신경이 날카로울 아들은 의외로 담담하게 "괜찮아요."라고 해주었다.


드디어 수능이 끝나고, 시험장을 빠져나오는 아들의 손에서 도시락을 받아 들었는데 묵직했다. 집에 와 열어보니 10%도 먹지 않았다. 처음부터 밥을 많이 먹을 맘이 아니어서 괜찮다고 말한 것이었다.


아들도 나처럼, 그날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시험을 치르기 위해 밥이 아닌 '약물'의 힘을 최대치로 이용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고2 때까지는 커피 같은 카페인을 전혀 입에 안 댔었는데 나의 권유로 카페인의 힘을 알게 된 아이는 고3 후반기에는 그 힘을 아주 신봉하고 있었다. 게다가 밥 많이 먹으면 오후에 나른하니 도시락은 조금만 먹으라는 선배님들 말씀을 너무 곧이곧대로 실천하는 바람에, 결국 커피박카스 속 카페인과 뇌로 에너지를 즉각 전달한다는 포도당 캔디만으로 연명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시험 도중 코피를 두 번 쏟았단다. 1교시 국어시험 때부터 코피를 쏟았는데도 점심을 거의 안 먹고 포도당으로 연명하다니. 그런 독한 노력에도 시험 결과는 많이 아쉬웠다. 우리 모두가 기대하던 성적에 미치지 못했다. 아들의 진학 관련 연구를 많이 한 남편이 분석을 해보더니 "딱 하나만 더 맞았으면 좋았을 텐데, 딱 한 문제만!" 하고 안타까워했다.


나나 아들이나 큰 일을 앞두고 너무 잘하려고 안 하던 짓을 하다가 일을 그르친 셈이다. 다행히 수능이 반영 안 되는 수시 일반전형으로 원하는 학교와 과에 들어갔지만, 수능성적이 반영되는 정시로 가야 했으면 일이 고약해질 뻔했다.


아무리 특별한 날이라도, 너어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살면서 몇 번 깨달았던 것인데... 왜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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