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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잃어버린 놀이의 즐거움을 회복하다

2017년 <정원놀이>전시에 관하여

김도희, 지지대나무, 2017, 고탄성 칼라 밴드, 타프, 가변설치


정원에서 잃어버린 놀이의 즐거움을 회복하다. 효율중심의 현대사회에서 역으로 그 가치를 주목받고 있는 정원 그리고 정원일의 가치를 놀이와 접목한 이 전시는 한 뙈기 땅이라도 흙만 있으면 무엇이든 자라게 하는 자연의 생명력과 흙만 있어도 무엇이든 상상하며 노는 아이들과의 관계에 대해 묻는다. 담장이 쳐진 공간, 정원 안에서 왜 인간은 자유함을 느끼고 즐거워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놀이’라는 키워드에서 찾은 이 전시는 순수한 인간 본연의 모습에 보다 가까운 아이들의 관점에서 답을 구한다.


슬로우 파마씨, Plant Specimen-2, 2017, 식물, 특수용액, 가변설치 
리즈닝 미디어, 정원여행-물, 흙, 바람, 빛, 2017, 기차모형, 혼합매체, 프로젝션영상, 가변설치


유한한 테두리 공간에 무한의 자연을 담아내는 정원은 마치 타임머신처럼 그곳에 들어선 이를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이끈다. 눈과 손에 닿는 정원의 볼 것, 만질 것들은 정답이 없는 열린 재료로 새로운 상상을 가능케 하고 사회적으로 정의된 일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정원에서 소꿉놀이로 차려진 식탁은 그 어느 가정의 식탁보다 풍요롭고 흥미로우며, 흙과 식물들 사이를 오가는 정원 공간의 숨바꼭질 놀이는 숨고 찾는 놀이 행위에 영감과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웃음을 찾고 스스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타인을 받아들이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 이는 정원을 경작하고 돌보는 동안 생명이 생겨나 유지되게 하려면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는 흙의 입장을 이해하는 과정과 닮아있다. 정원을 가꾸는 것은 한 뼘의 땅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미시적인 것에서 타인을 이해하며 지구 전체로까지 관계를 확장하며 한 인간의 사고와 인식의 폭을 확장시키는, 작지만 거대한 일이다. 정원에 숨겨진 크고 작은 놀이와 이야기들을 소통하고자 하는 이 전시는 현대미술작가들과 가든디자이너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자연을 재료로 한 예술의 공간이자 제 3의 자연인 정원에 예술가들이 들어오는 것은 낯설지 않다. 정원일이 놀이이자 예술인 정원사의 모습이 예술가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오경아, 꽃피는 고래 : Playscape 정원에서 놀자!, 2017, THP파이프, 방부목, 평철, 가변설치 
<정원놀이>전시 전경


김도희의 지지대는 100년된 굴참나무를 둘러싼 색밴드 사이를 요리조리 통과하게 함으로써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고 나무 안에 머물게 한다. 비커 속 보존액에 담겨 있는 슬로우파마씨의 식물들은 전시장을 과학실로, 관객이 실험자가 되어 자연을 탐구하게 한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씨앗의 형태들은 미세한 차이로 전혀 다른 종으로 분류된다. 리즈닝 미디어의 손 안의 기차를 타고 개미의 관점으로 땅 안팎을 넘나드는 정원여행은 호기심 가득하며 오경아 정원디자이너가 배수로로 사용하는 산업자재를 활용한 고래 등 위에 식물과 우수관 위에 떠있는 식물들은 어느 것 하나도 똑같지 않은 인간만큼이나 다양한 식물관에 대한 스펙트럼을 넓혀준다. 계단의 단차를 이용해 관객의 걸음을 머뭇거리게 하는 노해율의 느리고 불편한 조각과 관객 참여로 완성되는 박지숙의 정원산책공간은 아이들의 몸을 움직여 노는 풍경을 만든다. 윤가림의 그네를 타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정원에 머무는 바람을 느껴본다. 이화여대 자연사박물관과 유현정이 함께 만든 공간에서 자연에 숨겨진 기하학을 찾고 수풀 사이를 오가며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보면 오감을 자극하고 잊혀졌던 놀이 인자를 작동하게 한다.


노해율, LAYERED STROKE-blocking, 2017, 철, 나무, 300x127x134cm
박지숙, Meditation, 2015, 혼합매체, 가변설치


정신분석가 칼 융은 새로운 것의 창조는 지성이 아니라 놀이 충동에서 생겨난다고 하였다. 창조하는 마음은 좋아하는 대상과 함께 놀며 생겨나는 것이다. 프랑스어에 브리콜뢰르 bricoleur라는 단어가 있다. ‘손에 잡히는 재료로 척척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 땅에 떨어진 것들을 모아 놀이에 활용하는 훌륭한 브리콜뢰르들이다. 도토리 깍지와 나뭇가지가 아이의 눈에는 숟가락이 되고 솔방울은 아기 새가 된다. 예술가들의 모습에 아이들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처럼 인간의 본질을 ‘놀이’에서 찾았던 요한 호이징가는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에서 ‘놀이는 무언가의 이미지를 마음속에서 찾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놀이는 어린아이의 특이한 행동이 아니라 어른들도 해당하는 생물학적 욕구 이상을 바라는 행위이다. 이번 전시에서 해석된 아이들의 정원을 통해 잊혀진 인간의 모습, 놀이하는 인간을 회복해보고자 한다.


유현정, 숨바꼭질, 2017,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가변설치
윤가림, Swing, 2013, Stainless steel, 81x25x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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