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을 말하다> 책을 손에 쥐고 살던 2016년도 초반 유일하게 내가 아는 정원사는 관장님 한 분이었다. 지금 내가 아는 정원사는 다섯 손가락을 넘고 마당발인 미술관 팀장은 작가보다 정원사들을 더 많이 아는 것 같다. 정원사들과 친하게 지내는 그녀가 부러울 정도이다.
아마 이 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정원사의 세계는 정원사가 아닌 이의 세계와 다르다.” 정원사에 대한 지적 판타지를 심어준 말이었다. <정원을 말하다>의 세 번째 장 ‘인간적 정원사’에서 저자는 “정원일은 인식의 전환, 즉 세상을 보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한다”고 말한다. 이 어마어마한 말의 근거로 그는 이 장에서 초반부터 내내 체코 작가인 카렐 차페크의 <정원사의 한 해>라는 책을 독자에게 거의 읽히는 수준으로 길게는 한 페이지 통으로 인용하는데 차페크의 유머러스 하면서 허를 찌르는 말들은 온통 흙을 향해 있다.
“내가 완성된 정원작업을 멀리서 산만하게 구경하기만 했을 때, 나는 정원사가 새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으며 꽃향기를 경작하는, 특별히 시적이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일을 보다 가까이에서 보면서, 진정한 정원사는 꽃을 경작하는 이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흙soil을 경작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땅에 섞어가는 피조물이고, 우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광경을 남긴다. 그는 땅에 파묻혀 산다. 그는 퇴비 더미에 자신의 기념비를 세운다. 만약 그가 에덴동산에 간다면 신이 나서 코를 킁킁거리며 “주여 흙humus이 정말로 좋군요!”라고 말하리라. 나는 그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도 잊어버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천국의 흙을 한수레 정도 얻어갈 수 있을까 살펴볼 것이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을 돌보는 것이 정원일의 주됨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정원사는 흙에 빠져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천국에 가서도 흙을 퍼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니. 정원 전시를 준비하며 원예학과 교수님이 현장에 있는 제자들을 소개해주실 때 만났던 분 중에 마이 알레(My allée)라는 공간을 운영해 오신 우현미 소장님이 있었다. 대학시절 90년대 말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식물들로 공간을 구성한 숍이자 까페였던 그곳이 생경하면서도 신선했는데 그곳을 최근 몇 년 전 과천의 큰 농장 부지로 옮기셨다. 그곳에서 뵈었을 때 대표님이라면 정원이야기를 할 때 뭘 보여주고 싶으세요 라고 여쭈었더니 그날 본 아름다운 꽃들과 시크한 색과 형태의 나무들을 제쳐 두고는 “땅속이요”라고 말씀하셨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을 어떻게 저렇게 가꾸고 만나게 하는지에 관한 말씀을 짐작했던 나는 한순간 멍했다. 컴컴한 발아래 흙과 뿌리가 주인공이라니. 흙을 보는 것이 귀한 아파트 키드이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내가 ‘정원사가 아닌 이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원사의 세계에서 언어의 대상과 결도 달라짐을 목격한다. 흙이라는 단어에 이렇게 많은 형용사가 붙을 수 있는지 놀라웠다. “뱀처럼 미끄럽고 벽돌처럼 건조하고..납처럼 무거운 진흙”, “베이컨처럼 진하고 날개처럼 가볍고 숏케이크처럼 말랑말랑하게 부서지기 쉬운 흙”. 차페크의 흙에 관한 묘사들이다.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에게 보이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어린 시절에는) 무엇을 밟고 가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미친 듯이 어디론가 급히 가고, 기껏해야 구름이 아름답다거나, 지평선이 아름답다거나, 언덕이 아름답게 푸르거나 하는 정도만 알아차린다. 하지만 그는 발아래를 보고 거기에 있는 아름다운 흙을 알아차리고 찬양하지 않는다. 정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손수건만 하더라도 말이다. 무엇을 밟고 있는지를 알려면 적어도 화단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면, 친애하는 친구여, 당신은 심지어 구름조차도 발아래 흙만큼 다양하고, 아름답고, 끔찍하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미친 듯이 어디론가 급히 가는 친구인 나에게 정원이 있어야겠다. 손바닥만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꽃만 바라보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흙에 관해 이야기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