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을 가서 체류하게 되면, 한 숨 자고 일어나 혼자 때로는 마음 맞는 승무원, 아주 때로는 전체 크루가 모두 호텔 로비에 모여서 저녁을 먹으러 나가곤 했었다. 구두를 신고 약간은 부어 오른발에서 축축한 냄새가 밴 스타킹을 벗어던지면 그제야 비행을 끝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있어 비행에 대한 의무감이 끝나는 순간은, 비틀대는 비행기에서 반갑게 들리는 착륙이 10분 남았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도 아닌, 손님이 비행기에서 다 내리고 안전 점검을 마친 순간도 아니었다. 불타오르던 열정이 끝내 타오르고 의무를 다한 것처럼, 호텔방에 들어와 하얀 침대보를 씌운 커다란 침대 모퉁이에 걸터앉아 스타킹을 벗어던지는 순간 비로소 비행 하나를 잘 마치고 나의 공간에 들어왔다는 안도감이 들곤 했다. 좋았던 손님의 은은한 기억과 비행 중 조금 힘들었던 일이 있더라도 먼지 묻은 유니폼을 옷장 옷걸이에 걸고 몸을 씻어내는 순간 드는 개운함은 layover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씻고 자고 일어나면 가끔은 호텔 방 가득 햇볕이 내리쬐는 점심이기도 했고, 홀로 깨어나면 한밤 중이기도 했다. 수많은 도시의 낯선 골목길에서 어깨에 맨 에코 가방만큼이나 가벼웠던 나의 발걸음들과 때로는 피부색만큼이나 다양했던 왁자지껄하던 많은 크루들이 단체 여행객 인양 떼로 시내의 한 복판을 누비고 다녔던 순간들이 켭켭히 쌓여 이따금씩 나를 찾아오곤 한다.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들이 사진 속에서 금방이라도 3D 프린트로 인쇄되어 다시 그 순간들의 달콤한 기억을 한 숟가락 맛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항상 크루들이 같이 다니진 않았다. 북적거리던 비행기 안, 몸을 납작하게 요리저리 피해 가며 복도를 걷거나 붐비던 비행을 마치면 유난히도 혼자서 이름 모를 도시의 작은 골목길을 홀로 자유롭게 거닐고 싶기도 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도시에 도착해, 공항의 직원 통로를 재빠르게 통과해 지정된 호텔에 도착한 후 주어지는 나만의 시간, 그 시간이 내게 있어 비행의 또 다른 의미였다. 레이오버를 즐기기 위해 매 월 초 어느 도시를 스케줄에 신청할지 설레며 신청하곤 했다.
혼자 즐긴 레이오버의 좋았던 기억들 중에는, 초등학교 때 읽었던 안네의 일기에서 안네가 다락방에 숨어 살며 써 내려갔던 공간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안네의 집에 갔던 일이다. 나무 마룻바닥에 서서 안네가 썼던 책상과 침대가 있던 다락방을 다녀온 일, 그리고 프랑크프루트 괴테의 집도 좋았다.(그땐 일본인 크루 마오와 함께였다.) 런던에서 혼자 본 오페라의 유령도, 맨체스터에서 비행 가서 혼자 즐겼던 뮤지컬 위키드, 레미제라블. 아보카도를 사러 비행 전 우간다 슈퍼를 터벅터벅 걸어갔던 길 그리고 독일 약국에 걸어가던 주택가의 낙엽 쌓인 거리, 그 순간들 속에서 느끼던 자유로움이 종종 눈 앞에 서성인다.
비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초년생 때,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한 크루 한 둘이 모이고 모여 로비에 나가보니, 모든 크루가 나와 있었다. 대다수의 외국인 크루들은 중국 비행에 가면 언어 소통에 어려움을 겪어 중국어를 구사하는 크루들과 함께 나가기를 원했다. 예상대로, 중국인 크루는 고국에 왔으니 자신의 친구들과 가족들을 만난다고 오지 않은 터였다. A330 비행기를 타고 상해에 온 열 명 남짓한 크루들이 나누어 탄 2대의 택시는 목적지였던 상해 번화가의 한 쇼핑몰에 멈추어 섰다. 필리핀 사무장이 정말 좋아하는 식당이 있다고 너희들이 좋아할 거라고 해서 의심도 없이 중국식 음식점이라고 생각을 하고 따라나섰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데려간 곳은, 쇼핑몰 지하 1층에 있던 일본 식당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모든 크루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의 통역사가 되어야만 했다. 중국에 까지 와서, 옆 나라 일본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의문이었지만 우리는 벌써 자리에 앉아 주문이 끝난 상태였다. 크루들의 요구를 전달받아 멀리 있는 종업원을 불러 중국어로 말하기를 여러 번, 어느새 나는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있었다. 그 뒤로는 맘 맞는 크루 아니면 종종 혼자 나가 레이오버를 보내곤 했다. 때로는 학생인 양 때로는 여행객인 것 마냥, 아무도 모르는 도시에서 걷는 발걸음은 더욱 가벼웠다.
호텔에서, 외국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혼자 떠나는 여행이 싫어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당차게 홀로 떠났던 유럽 여행과 대만, 호주 그리고 중국으로 여정은 지금 생각해도 용감하고 당찬 나의 모습이다. 비행 생활을 하며 혼자 여행을 가려고 하니 막상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는데, 되돌아보니 비행 체류 기간인 수많은 도시의 레이오버에서 나만의 시간 "me time"을 잘 살아낸 것 같다.
붐비는 비행기 속,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뒤섞여 있을 때보다 비행 후에 주어진 시간이 내겐 일상의 자유로운 일탈 같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