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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리카노 Mar 01. 2024

미시건주 경선 뒤흔든 아랍계 미국인 유권자

"지지 후보 없음"이 민주당에 던진 메시지

미국 대통령 후보를 뽑는 민주당, 공화당의 경선이 한창이다. 아메리카노2024를 통해서도 여러 번 소개했다시피 오는 11월 본선의 매치업은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민주당은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선언한 상황에서 관행에 따라 실질적인 도전자 없이 경선을 치르고 있다. 공화당 경선 상황도 비슷하다. 일찌감치 대세를 굳히고 승리를 예약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아직 버티고 있는 니키 헤일리 전 UN 대사의 후보 사퇴를 압박하고 있다.

바이든과 트럼프 둘 다 약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약점이 최소한 후보 지명을 가로막을 만큼 심각해 보이진 않는다. 바이든은 역시 고령이 문제다. 걸핏하면 정말 대통령직을 4년 더 수행할 만큼 건강한 게 맞는지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 이미 역대 최고령 대통령인데, 4년을 더 하겠다는 바이든을 지지하는 이들의 마음도 대체로 뜨뜻미지근하다. 트럼프는 사법 리스크에 잔고도 텅 비지 않을지 걱정이다. 전직 대통령 중 처음으로 형사 기소됐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두 건의 민사 재판에서 우리돈 7천억 원 넘는 돈을 벌금과 손해배상금으로 내라는 판결을 받았다. 성공한 사업가에 엄청난 부자로 알려진 트럼프로서도 분명 헤쳐 나가기 쉽지 않아 보이는 자금난과 위기지만, 그래도 트럼프가 대선 후보도 되지 못하고 무너질 거라 볼 만한 근거는 부족해 보인다. 여전히 11월 본선에선 4년 전의 매치업이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


슈퍼 화요일 앞두고 치러진 경합주 미시건 경선

지난 27일, 슈퍼 화요일(Super Tuesday)을 일주일 앞두고 미시건주가 경선을 치렀다. 지금까진 두 당이 각각 경선을 치르더라도 보통 일정이 겹쳤는데, 올해는 민주당이 경선 일정을 조정했고, 공화당은 예년의 일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한 주의 경선을 두 당이 서로 다른 날 치르는 경우가 더러 생겼다. 그러나 미시건은 원래대로 슈퍼 화요일을 일주일 앞두고 민주당과 공화당이 같은 날 경선을 치렀다.

민주당 경선은 사실 지금껏 흥행 측면에선 지지부진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예상대로 거의 모든 대의원을 무난히, 싱겁게 확보해 왔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화당 경선에는 많은 관심이 쏠렸다. 트럼프에 맞서 끈질기게 물러서지 않는 헤일리 후보도 그렇고, 일부 주 대법원이나 주무부(선관위)가 트럼프의 후보 자격을 박탈하는 결정을 내리는 등 "어그로"를 끌 만한 요소가 많았다. 트럼프로서는 여러 부정적인 이슈에 휘말리는 건 물론 달갑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역경을 딛고 연전연승에 성공하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선 지금까지 공화당 경선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 미시건 경선은 의외로 민주당 경선에 상당한 관심이 쏠렸다. 공화당보다 민주당 경선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 같다.

미시건주 민주당 경선 결과를 정리한 뉴욕타임스 화면을 갈무리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모두의 예상대로 1등을 차지한 바이든이 아니다. 95% 가까운 몰표를 어렵지 않게 받았던 다른 주들과 달리 가까스로 80%를 넘은 바이든의 지지율, 그리고 2등을 차지한 "Uncommitted", 우리말로 옮기면 "지지 후보 없음"이란 표심이 미시건 경선의 주인공이다. 민주당원 가운데 무려 10만 명 이상이 굳이 경선 날 투표장에 가서 투표용지를 받고 기표소에 들어가서 (혹은 터치스크린 앞에 서서) 주어진 후보 가운데는 찍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을 밝힌 거다. 이는 전체 투표한 이들 가운데 13%가 넘는 비중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그 전에 대선에선 경합주가 중요하다는 자명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한 번만 더 짚고 넘어가자. 오는 11월 치르는 미국 대통령 선거는 우리나라처럼 미국 전체 유권자의 표를 한꺼번에 모아 집계하지 않는다. 대신 주별로 표를 집계해서 주에서 승리한 후보의 정당이 제출한 명부대로 선거인단을 꾸린다. 민주당 후보가 이기면 민주당 사람들로 채운 선거인단이, 공화당 후보가 이기면 공화당 사람들로 채운 선거인단이 주를 대표해 표를 행사하는 거다. 그렇게 한 투표에서 과반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후보가 최종 당선된다. 유권자의 표와 대통령 선거 사이에 선거인단이란 절차를 한 번 더 거치지만, 그렇다고 미국 대선을 간접선거로 분류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지난 글에서 했다.

주별로 표를 집계해 선거인단을 뽑을 때는 승자독식 방식을 따르며, 그래서 경합주(swing state)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미국 대선은 표를 집계하는 선거인단, 승자독식 제도 때문에 유권자의 푯값이 다르다. 경합주에 사는 유권자들은 후보들이 특히 잘 보이고, 절대로 실망하게 해선 안 되는 대상이다. 반대로 경합주에 들지 못하는 대부분 주 (올해 대선에선 44개 주) 유권자들은 대통령 후보의 관심을 받기 어렵다. '어장 관리' 능력이 탁월해야 하는 대통령 후보에게 경합주에 살지 않는 유권자들은 이미 잡아 놓은 내 물고기 혹은 어차피 잡을 수 없는 남의 물고기다.

미시건은 1992년부터 민주당이 여유 있게 승리하는 블루 스테이트(blue state)였다. 그러다 트럼프가 당선된 2016년 선거부터 대표적인 경합주가 됐다. 당시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을 불과 1만1천여 표, 득표율로는 0.23%P라는,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로 꺾고 미시건에 배정된 선거인단 16명을 다 가져갔다. 미시건을 비롯한 러스트벨트 지역의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트럼프에게 표를 몰아주면서 (혹은 클린턴이 싫어서) 트럼프가 당선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주목받게 된 이유는 이들이 트럼프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러스트벨트 경합주에 모여 사는, 푯값이 높은 "귀하신 몸"들이라 그렇기도 하다.


아랍계 유권자들은 민주당으로 돌아올까?

최근 미시건에 사는 유권자 집단 가운데 바이든 행정부에 불만이 극에 달한 이들이 있다. 바로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인들을 비롯한 아랍계 미국인들이다. 미시건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아랍계 미국인들이 모여 사는 주로, 그 인구가 20만 명에 이른다. 아랍계 미국인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강했다.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 이민자 커뮤니티에선 공화당보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강하기도 하고, 9.11 테러 이후 미국 내에서 무슬림을 향한 공포와 혐오가 급증했을 때 대통령이 공화당의 조시 W. 부시였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아랍계 미국인들 가운데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중동전쟁을 겪고 피난길에 올라 미국에 정착한 이들도 적지 않고, 이번 전쟁 때 가족이나 친척이 목숨을 잃거나 피난민이 된 사람들도 많다. 당연히 이들은 가자지구에서 민간인 학살에 가까운 군사 작전을 펴는 이스라엘군과 네타냐후 총리를 미국 정부가 막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 이후 지금까지 무조건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는 태도를 분명히 해 왔으며, 즉각적인 휴전 협정을 중재하는 데도 난색을 보여 왔다. (물밑에선 네타냐후 총리를 압박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난 결과는 그렇다.)

지난주엔 UN 안보리에서 즉각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상정됐는데, 15개 이사국 가운데 상임이사국 미국이 유일하게 거부권을 행사했다. (영국은 기권했고, 나머지 13개 이사국은 결의안에 찬성했다. 비상임이사국인 대한민국도 찬성표를 던졌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 온 아랍계 유권자들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크게 실망했고, 마침 대통령 후보를 뽑는 경선이 열리자, 표로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선거를 앞두고 아랍계 미국인 유권자들을 취재한 기사나 팟캐스트를 보면, 이들은 지금껏 민주당이 아닌 후보에게 표를 준 적이 없고, 2020년에도 당연히 바이든을 뽑았지만, 이번만큼은 이스라엘 편만 들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곤경을 외면하는 바이든을 찍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시건주에 사는 아랍계 미국인 20만 명 가운데 무려 10만 명 넘는 사람이 총선도 아닌 민주당 경선에서 지금의 민주당엔 표를 줄 마음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8년 전에 1만1천여 표 차이로 미시건주를 빼앗겼던 민주당으로선 대단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아랍계 유권자들이 바이든에 실망했다고 본선에서 공화당과 트럼프를 찍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투표 자체를 하지 않거나 제3 후보에게 투표하면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경합주 미시건을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뭐든지, 뭐라도 해야 하는 비상이 걸렸다.

뉴욕타임스는 바이든의 중동 정책과 가자 지구를 향한 무대응에 실망한 아랍계 유권자들을 다시 두 부류로 나눴다. 그나마 경선에 나와서 "지지 후보 없음"이란 뜻을 밝힌 사람들은 바이든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 휴전을 이끌어내거나 팔레스타인을 사실상 지도에서 지워버릴 때까지 피의 보복을 다짐하고 강행하고 있는 네타냐후 총리를 붙들어 놓는다면, 본선에선 바이든에게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바이든에게 더 크게 실망해서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트럼프를 뽑지는 않겠지만, 바이든도 트럼프보다 나은 점을 도저히 찾을 수 없으므로, 이번 선거에선 투표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들이다. 아랍계 유권자 가운데 바이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좀 더 기다려줄 이들이 얼마나 되며, 이미 마음이 바이든과 민주당을 떠나버린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너무나 중요한 경합주 미시건에서 일어나는 일인 만큼 민주당은 노심초사,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바위에 균열 낼까?

아랍계 미국인들이 경합주 미시건에 모여 살다 보니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사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이스라엘과 유대인 유권자들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 된다는 절대적인 불문율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진퇴양난인 셈이다. 

미국에서 가장 힘이 센 로비 단체를 꼽을 때 늘 가장 먼저 언급되는 단체 중 하나가 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AIPAC, 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다. 재계, 금융계의 큰손인 유대인들이 엄청난 돈을 후원하는 단체는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해 로비 활동을 벌이며, 민주당, 공화당 할 것 없이 미국 정계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아무리 경합주의 아랍계 미국인 유권자들의 표심이 중요한들 시쳇말로 미국의 0티어 동맹국인 이스라엘과 등을 지는 건 대통령 후보로서 정말 무모한 일이다.

그래서 아랍계 미국인들의 저항을 눈여겨보면서도 종국에는 이들의 노력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그칠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아랍계 유권자들은 이 점을 잘 알면서도 선택지가 없으므로, 바이든과 민주당을 향해 절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민주당 일각에서는 '설마 바이든한테 실망했다고 투표를 안 하면 아랍계 유권자들에겐 더 끔찍한 인물인 트럼프가 당선될 수도 있는데... 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이 바이든을 찍지 않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그런 이들에게 뉴욕타임스 팟캐스트에서 인터뷰한 한 유권자의 말을 전하고 싶다. (대강의 내용을 추리고 표현을 고쳐 다시 썼다.) 어쩌면 이 말은 양당제 시스템하에서 "그래도 우리가 저쪽보다는 덜 나쁘지 않으냐"는 차악론을 앞세워 노선이 선명한 소수 정당이나 군소 후보에게 가는 표를 끌어오려는 모든 양대 정당 기득권을 향한 일침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민주당 후보가 좋아서 찍은 적도 있고, 민주당 후보는 그저 그랬지만, 공화당 후보가 너무 별로여서 민주당에 투표한 적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번엔 분명해요. 누가 더 나은지, 아니 누가 덜 나쁜지를 도저히 가리지 못하겠단 말이죠. 할 수만 있다면 이참에 사실상 두 가지 선택지만 주고 덜 나쁜 거라도 어떻게든 골라보라는 구시대적인 선거 제도 자체를 바꿔버리고 싶네요. 당장은 그럴 수 없겠죠. 그럼 저더러 어떡합니까? 두 후보 다 제 가족과 친지가 죽어 나가는 상황을 나 몰라라 하거나 심지어 부추기는 사람밖에 없는걸요? 투표 안 합니다. 저 사실 "투표하지 않음으로써 의사 표시하는 것도 정치 참여의 한 방법"이라고 하는 말 헛소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럴 줄 몰랐네요. 바이든한테 충분히 시간 주고 기다렸다고 생각해요. 이제 당신에게 투표할 일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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