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무의식을 통해 보는 따돌림 4
예수 그리스도가 당했던 사회적 따돌림
신화와 옛 이야기 그리고 위인들과 성인들의 삶 속에도 따돌림의 원형들이 들어 있다. 특히 신약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따돌림에 대해 가장 주요한 특징들을 모두 갖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며 성스러운 신적인 측면에 대한 이야기는 신학자들의 몫이 분명하다. 나는 다만 인간 예수의 이야기에서, 따돌림당하고 처형당한 예수. 그리고 기꺼이 그 과정을 수용하고 나아감으로써 집단의식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유태 민족의 잠재된 부정성과 폭력성의 정화에 기여한 사회 속 예수의 인간적 측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 시대, 유태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고 민중들은 식민통치의 핍박과 고통 속에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의 힘을 모으고 나라를 되찾을 원동력을 만들고자 애쓰는 한편, 로마인들의 손에서 구원해 줄 지도자 또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예수가 나타났다. 그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중들을 가르치는 한편, 민중들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로마에 붙어 기생하는 기득권층들의 특권과 허례허식으로 가득한 유대교와 제사장들을 향해 ‘당신들은 거룩한 척 하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아닌 당신들이 바로 죄인이다. 잘못을 돌이키라‘고 요구했다.
예수는 그들의 부정과 무지와 잘못과 비리를 지적하고 비판했다. 그들이 바뀌고 변해야 새로운 세상이 오고, 새로운 세상이 왔을 때 제대로 된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설파했다.
언제나 민중들 위에서 특권으로 군림하던 지배계층은 예수라는 한 젊은이에게 부정당하고 모욕당하고 그리고 죄인으로 규정당하는 것이 좋을 수 없었다. 그들의 삶의 기반이야 두려움에 눈 먼 대중들이 가져다 바치는 헌금, 세금 그리고 침략자 로마에 빌붙어 얻은 자기들의 권위에 대한 복종 같은 것이었다. 그것의 기반이 위험해지고 있었다. 예수를 급속하게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져가고 있었고 그는 대중적인 영향력과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그들 집단은 예수에 대해 위협을 느꼈고 그를 그대로 활동하도록 놓아 둘 수 없다. 이렇게 하여 잠재적 가해자와 희생자 간의 자극이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가해자와 희생자가 정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표적물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를 위하여 가능한 모든 폭력적이고 비열하고 은밀하며 뻔뻔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해 악의적 소문을 만들어 퍼트렸다. 또한 예수에 대한 의심과 회의 그리고 혐오를 심어갔다. ‘그가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하더라,’ ‘그는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 한다’는 등의 거짓말을 또한 퍼트렸다. 그것은 예수의 의도 및 활동의 진정한 목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짓이었지만 대중들에게는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었다.
유태인 기득권층들은 계속해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집요하고 끈질기게 회유했고 포섭해 나갔다. 그리고 그중에 핵심적이며 적극적인 동조자를 만들어 내었다. 그는 가롯 유다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였으며 신뢰받던 측근이었다. 그가 흔들리고 포섭될 정도였으니 다른 대중들은 거의 다 이미 예수에게 등을 돌린 상태이거나 의심을 품은 상태일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희생자를 일격에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확보했다. 따돌림에서 보통 가장 친했던 친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배신하게 하는 전략인 것이다. 이는 희생자를 무너지게 하는 마지막 ‘최후의 일격’과 같은 것이다. 친했던 친구의 배신은 희생자를 결정적으로 무너지게 하거나, 악에 바치게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예수에게서 대중은 점점 떨어져 나갔고 악의적 소문이 난무했으며 예수를 의심하고 욕하는 사람들의 무리들이 생겨나면서 예수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무엇보다도 그가 와서 주려했던 모든 메시지들이 힘을 잃고, 그가 주려했던 진리가 거부당하고 의심당했으며 그가 주려했던 삶의 희망이 모두 내던져지고 짓밟혀졌다.
실제 따돌림 현상에서도 희생자가 아무리 따뜻하게 대하고 좋은 것을 나누려 해도 가차 없이 내던지고 짓밟고 무시하는 것을 여지없이 볼 수 있다. 그들은 예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그가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과 병자와 함께 먹고 자고 그들을 가르치는 것을 폄하하고 비웃었다. 그들은 대중들에게서 예수에 대한 혐오감을 주입하며 그 위상을 끌어내렸기 때문에 까닭 없이 예수를 혐오하고 적의를 품고 죽이려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분위기는 이제 가해자들이 의도한 대로 바뀌었다. 그러자 그들은 날짜를 잡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로마 법정에 예수를 고발하고 그를 결박하여 넘기기로 작전을 세웠다. 이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침략자의 손에 자기 형제를 모함하여 넘기고 재판하게 하여 인신을 구속하고 처벌하도록 만드는 것은 얼마나 비열한 의도인가? 그러나 그들은 비열함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위기의 때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그 제자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는 위기를 알고 있었지만 그 가까운 제자와 친구들은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들은 아무도 예수를 돕지 못했다. 예수 혼자서 그 모든 다가오는 위험을 맞이해야 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 중 하나가 다가와 신호를 보냈고 강도나 사기꾼을 잡으러 오는 것처럼 무장한 이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 아무도 예수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베드로의 반발이 있었지만 예수는 그의 안전을 위해 베드로를 제지했다. 그렇게 너무도 쉽게 예수는 로마 법정에 세워졌고 바로 죄인의 신분이 되었다.
가해자들은 점점 나날이 힘을 얻어서 점점 무섭게 세력을 만들어 나갔다. 가해자들은 완전히 장을 장악했고 집단의 흐름을 틀어쥐고 부정성을 저주처럼 일으켜 모두를 옭아맸다. 그 공포는 너무도 강력해서 예수를 잘 알고 있거나 도우려는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입 닫고 얼어붙게 만들었다. 수제자 베드로조차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아무도 예수를 위해 변호를 하거나 그를 도울 수 없었다. 그랬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가해자들은 공격과 폭력을 드러냄으로써 자신들의 결속을 강화하고, 중간인들에게 힘을 과시하며 더욱 권력을 잡아갔다. 중간인들은 권력이 폭군들에게 넘어가고 있지만 자신들에게 직접적 위협이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방관 내지 동조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권력과 힘이 있었기에 줄을 서고 적극 동조했다. 그들은 폭군의 세상이 되었을 때 당할 불의와 모욕과 착취와 공포쯤은 아랑곳 않고 기꺼이 그들의 딸랑이나 강아지가 되어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또 그것으로 출세길을 열어보고자 했다.
그때까지는 은밀하게 진행되어 오던 일이 이제 표면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충분히 준비가 되었고, 자신들이 장과 분위기 그리고 사람을 모두 장악했기에 폭력을 드러냈다. 아무도 감히 그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고 그들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들이 곧 진리였고 대세였다.
그들은 서슴없이 폭력과 살기를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들이 스스로 법이 되고 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쪽은 무조건 악이고, 죄로 규정되었다. 그 기세에 눌려 제자들조차도 스승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주: 잘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현대에 들어서 전 세계의 정치판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매카시즘 같은 것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다르면 공산주의자로 몰아 적으로 규정하고 권력과 힘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처벌하고 처형하는 일이다. 우리가 매사에 숙고하고 고민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나 따돌림을 넘어서 이런 일을 당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제 집단 재판과 집단 처형이 가능해 질 만큼 악이 장악한 장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예수의 죄목은 그들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었다.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칭했다.” 즉 유태인 왕 모독죄 혹은 사칭죄 정도였다. 실제로 예수를 처형할만한 죄는 없었다. 예수가 법률을 위반한 것도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궁색하게도 그에게 죄를 만들어 씌워야 했고 또 억지를 써야 했다.
따돌림의 특성 즉 희생자의 잘잘못을 공정하게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를 공격한다는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수가 유대인의 정신적 왕으로서 살아가든, 신의 아들로 살아가든 그것은 예수 개인의 존재 방식이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진 않는다. 그러나 투사가 일어나는 곳에서는 그의 존재를 문제 삼지 그의 잘잘못과 그가 끼친 해가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를 문제 삼지 않는다.
제 정신인 법관이라면 이것이 사형을 언도할 만큼 큰 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 하나 로마법정은 무죄를 선고하고 예수를 석방하지 못했다. 이미 집단의 장은 유태인 가해자들에게 장악되었고, 부정성을 표출할 출구를 잡은 집단의식은 예수를 처형하는 쾌감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하고 있었다. 그들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자 안달이 나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외쳤고 로마 법관인 빌라도마저 그 살의에 압도당하여 어쩔 수 없었다.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선언한다면 분노한 대중들이 민란을 일으킬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찌하여 그를 죽이라고 외치는 분노한 대중들만이 모여 있던 걸까? 그들의 분노는 어디서 온 것일까? 어찌하여 그들은 예수의 "잘못이 아닌 예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공격하는 것일까?
드디어 예수가 사형을 선고받고 형틀에 매달려 완전히 무력해졌을 때 한때 예수를 따르던 중간인 들은 예수의 뺨을 때리며 모욕과 조롱을 가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봐라. 왜 그토록 하느님의 아들이라 외쳐 왔으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은 너를 구하지 않는 거냐? 널 위해 천사들을 보내 달라고 해라. 어디 천사들이 너를 구하러 오는지 한번 보자.”
그들은 분명히 예수가 나누어준 빵과 물고기를 먹고 예수의 발치에 앉아 가르침을 들었던 자들이며 예수에게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며 예수에게 축복을 내려달라고 간청했던 자들일 터였다.
예수가 보통의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여기에서 화를 내거나 절망을 했어야 옳다. 십자가에서 극도의 고통 속에 있던 예수를 조롱하고 모욕을 가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소외받고 착취당했던 사람들이며 노예 상태에서 목숨만을 부지하던 무지렁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가슴으로 안아 주고 먹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떼어 준 빵을 먹었고, 예수에게 세례를 받았고, 예수에게 축복받았던 자들이며 예수에게 천국에 갈 때 데려가 달라고 했던 자들이며, 예수로 인해 멍에를 벗고 희망을 가졌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외로울 때 예수가 함께 있어 주었던 이들이며 아플 때 치료해 주었던 이들이며 외로울 때 안아 주었던 이들이다.
그들이 가해자 편에 서서 자신들이 힘을 가졌다고 믿고는 처형을 받아 죽어가는, 그들의 선생이며 구세주이며 등불이었던 이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으며 그의 육신과 그의 가르침을 모욕하는 것이다. 가해자들이야 본래 나쁜 놈이기에 그렇다고 쳐도 자신을 따르던 측근들이 그렇게 배신할 때는 용서도 더 힘들고 분노도 더 크며 배신감도 폭증한다.
따돌림에서 가해자들은 끝까지 희생자들의 내면에서 폭력성을 끌어내려하고 그것이 폭주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이는 곧 가해자가 그 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부정성을 대표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희생자의 폭력성이 이어지고 폭발하면 가해자들 또한 같이 희생당하게 되는데도 그들은 그런 행위를 어느 선에서 멈추지 못한다. 그들은 더 큰 악에 의해 인도되고 있고 더 큰 악에 봉사하며 그 악에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이성은 마비되어 있고 심지어 퇴화되어 있다. 그들은 그들이 사로잡힌 복수의 쾌감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하거나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의 위대한 승리는 여기에 있다. 가해자들은 폭력을 통해 예수 안에서 손톱만큼의 부정성도 건드리지 못했고 끌어내지 못했다. 예수는 그들을 원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예수는 바로 그들을 끌어 안으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 순간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그들이 조건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해주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그 순간 사랑과 연민이 결핍되어 있었다. 사랑과 연민만이 그들을 치유하고 되돌릴 유일한 것이었다.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며 자신을 열어 그들을 향한 자신안의 사랑과 연민을 보여 주었다. “주여 저들을 가엾게 여기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합니다. " 이것이 예수의 진정한 승리다.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무능과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또한 비굴해지거나 폭력으로 폭주하지 않고, 그런 그들의 악마성에 대해 끝까지 사랑과 용서 그리고 연민을 보여준 모습. 이 모습으로 인해 예수는 가히 신이며 또한 신의 아들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우리 희생자들에게 예수와 같은 순수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예수를 또 다른 폭력의 도구로 쓰는 것이다. 예수는 예수의 수준이 있고 우리 개개인은 개개인의 의식 수준이 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의식 수준만큼 살아가며 그 의식 수준만큼 존중되고 배려되어야 한다. 그게 평화다.
본질적으로 예수에 대한 중간인들의 분노는 예수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가족 내력과 그 민족의 특성과 그 자신으로부터 억압되고, 압축되고 쌓여온 것들이었다. 그것을 예수에게 투사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 안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바깥의 누군가에게 투사하여 “다 너 때문이야!”로 귀결 짓고 그에 대한 처형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유태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신전에서 양이나 비둘기, 소 같은 희생 제물을 죽여 신께 바치는 의례가 있었다. 유태인 민족은 전통적으로 피, 속죄, 대속 같은 의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비둘기나 양 등을 잡아 피를 흘려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대속한다 여겼다. 그것은 어쩌면 본래 사람을 신전에 바치던 고대의 인신공양 행위가 나름대로 완화된 것이었다 할 수도 있다. 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은 자신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용서해 주십사 하는 집단적인 죄책감을 말하는 것이다.
현대에도 인간이 살인 등 극단의 잘못을 하면 죽음으로써 그 죄의 용서를 빌거나 혹은 처형되는 사형 제도가 아직까지 여전히 남아 있지 않은가? 그들은 삶의 구조로 인해 쌓이는 죄에 대한 죄책감을 씻기 위한 제도가 필요했다. 그런데 예수는 비둘기나 양이 대신 너희들의 죄를 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죄를 씻는 것은 비둘기나 소나 양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죄를 돌이키고 회개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러면 신전에서 그것으로 장사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의 이익과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대신 죽인 후, 예수의 죽음이 그들의 죄를 씻는다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태인들의 역사는 다른 민족들의 땅을 뺏고 또 빼앗기는 수많은 전쟁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 전쟁에서 그들은 때로 과부와 고아 그리고 여자들까지 몰살하는 등 실로 잔인한 살해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무서운 하느님 아버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하느님은 자기 말을 잘 듣는지 아닌지 보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제단에 태워 죽이라는 명령까지 하는(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의 이야기) 무서운 아버지 하느님이었다. 더구나 그 아버지 하느님은 또한 극단의 영적인 삶과 순수를 요구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죄책감은 더욱 무게를 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무서운 아버지’ 하느님의 역사에서 그들의 무의식에는 두려움과 공포, 무기력과 분노가 억압되어 있었고 동시에 타민족 침략과 수없는 살해 속에서 죄책감, 죄의식 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할 수 있다. 가해자들은 중간인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런 부정적인 무의식을 교묘하게 건드리고 그것의 표출구로서 희생자를 선택했다.
그 희생자는 그들 자신보다 덜 때 묻고, 덜 부정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어두운 것을 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통의 희생자들은 더 밝고, 더 행복하고, 더 순수하며 침묵하고 또한 그들보다 덜 폭력적이어서 그들에게 비교적 안전한 대상이 선택된다. 유태인들의 부정적인 스트레스를 쏟아 내는 배출구로서 예수보다 더욱 안전한 상대는 없었다. 그는 끝까지 그들을 받아주었고 감싸주고 사랑했다. 맞서고 폭로하고 전쟁하지 않았다.(주: 예수와 달리, 같은 구약의 역사를 공유하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예수가 선지자로서 실패하여 미카엘로부터 자신이 마지막 선지자로 다시 보내졌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이들에 맞서 싸움과 전쟁으로 자신들을 지켜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성격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는 종교에 대해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 종교를 비교하여 봄으로 차별성을 간략하게 인지하기 위함이다.)
예수의 이야기에는 놀랍게도 따돌림이란 원시적 폭력의 가해자의 특성과 희생자의 특성 그리고 실제로는 가해자 편인 중간인의 특징이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자신들 사이에 있던 뛰어난 한 사람을 어처구니없는 분노와 광기로 합법을 가장하여 살해한 이들은, 시간이 흐르자 이상하게도 예수가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여 희생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너무도 이상한 사건이다. 처음에 예수를 따르다가, 그다음 예수를 배반하고, 가해자들을 따라 예수를 죽였던 그 대중들은 어찌하여 예수가 자신들의 죄를 대속했다고 말하는가?
각 지역의 여러 고대 사회에서는 주기적으로 신에게 산 사람을 제사로 바치는 인신공양 의례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마야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문명 속에도 그런 의례가 있었다. 신에게 바칠 희생자가 선택이 되고 제사의 날이 가까워지면 대중들은 희생자를 신전에 바쳐 그를 죽여 그 피를 마실 때 까지 트랜스 상태에서 광기 어린 춤을 추며 축제의 날을 즐겼다.
그처럼 중간 대중들은 그렇게 가해자들의 폭력에 동조되어 있다. 그들은 도취되어 트랜스 상태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희생자가 희생될 때 까지 결코 그 트랜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희생자의 어떤 고통에도 연민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며 희생자의 고통이 오직 환희와 쾌감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에 대해 그 잔인함의 정도가 크던 작던 에너지적 본질은 같다. 오직 희생자가 희생된 후에, 피와 폭력과 고통의 제전이 끝난 후에야 서서히 그들은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가족들을 알아보고 다시 이웃의 얼굴을 보며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 지를 본다. 그리고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한다. 마음껏 부정성과 분노를 표현했던 그들은 어느 정도 정화되었고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들의 양심이 서서히 돌아오고 두려움의 감각이 다시 살아나며 트랜스 상태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들이 진짜 어떤 벌을 받거나 처벌을 받게 될지 모른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금기처럼 희생자에 대한 험담을 금한다. 어쩌다 말이 나올 것 같으면 가해자에게 아부했듯 순결한 희생자에 대해 좋은 점을 이야기하다가 마치 경쟁하듯이 칭찬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더욱 찬양과 찬탄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들 내면의 죄책감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이제는 희생자에 대한 찬양과 승화 그리고 신성화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것이다.
집단 폭력이나 따돌림에서 희생자가 자실이든 집단 타살이든 어떤 식으로든 처벌되었을 때 가해자들과 그에 동조, 묵인, 방관했던 중간인들의 태도 또한 유심히 살펴보라. 그 순간만큼은 희생자 앞에서 양처럼 순해져서 흰 눈처럼 순결한 태도나 찬사를 바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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