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무의식을 통해 보는 따돌림 3-
따돌림은 고대사회의 집단 재판과 집단 처형이다.
과거에는 제사, 굿, 잔치, 종교의식, 축제, 등이 집단의 부정성을 정화하고 긍정성을 강화시키는 순기능의 역할이 있었던 반면, 동시에 의식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집단의 부정적 의식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형태가 있었는데 이는 ‘집단 여론 재판’과 ‘집단 처형’이었다.
예수의 시대에도 바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여론 재판과 처형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도 도둑질을 한 사람이나 범죄자에 대하여 멍석말이를 비롯하여 전염병자가 있는 집에 불을 지르는 등의 집단 처형이 있었다. 서양의 중세시대에는 마녀사냥이 있었다. 또한 파키스탄이나 인도 이슬람 국가에는 아직도 마을에 관습적으로 내려오는 투석형 같은 집단 처형의 예들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다.
집단 처형은 처음 누군가 그 마을에 암묵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관습과 제도를 깬 사람(도둑질, 간음, 강간 등과 전통적 문화적 틀을 깬 사람)을 목격하거나 혹은 보고하면 이에 공감하고 동조하는 적극 지지자들이 나머지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여 돌멩이나 기타 도구를 무기화하여 범죄자라 여기는 사람을 둘러싸고 때리거나 찌르거나 화형 하거나 매장하여 죽이는 것이다.
사람들 속에 쌓인 부정적인 에너지는 그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해소되고자 한다. 왜냐하면 집단 무의식은 생존에 있어 보다 효율이고 간편한 방식이라 여겨지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의식과 달리 선과 악, 좋고 나쁨이라는 이중적인 잣대를 모른다. 무의식은 의식이 이끌고 길을 터주는 대로 그것을 실현할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
따돌림의 가해자들은 타인의 존재에 대하여 가차 없이 판단하고 그들에게 일어날 일을 결정하는 반면 집단 무의식은 그에 대한 아무런 판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실현할 힘을 부어 주는 것이다. 따돌림에 있어서도 몇몇 가해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판단이나 잣대에 대한 깊고 선명한 분별없이 무의식적으로 가담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비단 심각한 범죄자에 대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누군가 개인적 감정과 판단으로 어떤 사람을 무고하고, 대중들을 선동하여서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이다.
이 집단 처형 기제는 오늘날 학교나 집단에서 나타나고 있는 따돌림 현상과 너무도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따돌림은 몇몇 사람들이 주도하여 여론을 만들고 험담과 뒷담화로 여론재판을 형성한 후 집단 전체가 그에 가담하여 그의 처형에 동참하는 것이다. 옛날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투석이나 화형 같은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라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교묘한 심리적 파괴, 관계 단절, 정서적 공격과 신체적 폭력 같은 것들이 가급적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심층 구조를 보면 옛날의 집단 처형의 구조나 형태 그리고 현재의 집단 내에서의 왕따는 결국 같다.
현대에도 소규모 집단의 따돌림에서 집단 처형이 일어나는 것을 나는 실제로 목격했었다. 따돌림의 표적인 희생자를 고립시킨 후에 그 집단 구성원들은 밤마다 돌아가며 희생자를 찾아와 “너 같은 것은 죽어야 한다. 왜 그렇게 사니? 그렇게 살 바엔 죽는 게 낫지 않느냐?” 하며 직접적으로 자살로 몰고 가는 것을 말이다.
이들은 밤마다 술파티를 벌이며 희생자에 대한 험담과 공격 거리를 만들고 공유했는데 완전히 그들만의 소설이었다. 희생자는 길고 탐스런 머릿결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를 꼬여서 몸을 팔려고 머리를 기른다.” 그들은 희생자의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말했다. 그들은 교묘하게도 희생자의 자존감을 공격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혐오하게 하고 회의하게 했다.
그들은 밤마다 그를 찾아와 자살을 강요하는 것을 자신들이 해야 할 임무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죄책감도 부끄럼도 두려움도 없었다. 왜? 그들은 다수 있으니까. 그리고 양심과 죄책감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집단재판을 하고 집단처형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 자신조차도 까마득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죽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멀쩡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가해 그룹의 구성원들 한 개인 개인을 따져보면 모두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여서 희생자에 대해 험담을 하고 판단을 하고 처형으로 몰아갈 때는 강력한 부정적인 힘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들 스스로 판단력과 인지력을 상실한 채 집단의 방향과 압력에 굴복한 채 기꺼이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다.
따돌림의 표적물을 고립시킨 후 괴롭히다 자살을 강요하는 일들은 따돌림의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자주 보도되는 것이다. 또한 군대나 학교 등에서는 보다 더 적극적인 집단 처벌이 일어나기도 한다. 은밀히 자살을 강요하거나 자살로 몰아가는 것 이외에도, 적극적인 폭력이나 괴롭힘으로 자살로 몰아가거나 혹은 따돌림의 주도자들이 폭력으로 표적물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한나 아렌트의 말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에 대해서 깊은 숙고와 고민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언제나 악을 범할 가능성에 놓여 있게 됩니다. 악은 그렇게 우리 곁에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이것은 지식과 정보가 적었던 고대 비 문명적인 사회나 문명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현대나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악을 범해놓고 무지로 도망가서 숨을 수 없다.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숙고와 고민 인지와 자각은 스스로 자기 정신을 밝히는 등불과 같은 것이다. 그 등불을 켜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다. 늘 그 등불을 켜놓고 살아도 사과할 일들이 생기고 실수가 생겨난다. 하물며 그 등불을 켜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악에 사로잡힐 가능성에 놓여있다.
칼 융의 말 또한 다시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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