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ast to Coast UK. Prologue
이 글은 등산을 세상 가장 이해 못 할 취미라고 생각하는 내가 어느 날 설거지를 하다 얼떨결에 결정해버린 영국 Coast to Coast(C to C 혹은 C2C) 트레킹의 기록이다.
책 읽기를 싫어한다.
어릴 땐 참 책을 좋아했는데. 인간의 삶에 책 읽기의 총량이 있다면, 나는 아마 10세쯤까지 그 총량을 다 채운 게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1학년, 내가 참 싫어했던 담임은 첫 성적표에 '어휘력이 좋음'이라고 써두었다. 그때 그 어휘력 좋았던 아이는 그것에 퍽 만족했던지 아직도 그때 그 어휘력으로 먹고 산다.
책 사기는 좋아한다. 누군가 온전히 펴 본 적이 없어 아직 책등에 줄 하나 가지 않은 책을 두 손에 들었을 때의 신선한 느낌이 있다. 게다가 낯선 책을 가졌을 때 느끼는 '지식인이 되어가는 느낌'은 다른 어떤 사물도 줄 수 없다. 보통 그 느낌은 택배로 도착한 책을 뜯어서 휘리릭 넘기고 책장에 꽂거나, 아니면 서점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영수증과 함께 가방에 책을 넣는 순간 끝나지만, 책을 얻기까지 들인 금전적, 신체적 노력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비슷한 이유로 도서관에서 책 빌리기도 좋아한다.
그래서 더운 여름날, 책을 하나 빌려두었다. 그 책에서는 어떤 냄새가 나는 듯했다. 가끔은 무척 그리운, 영국의 비 오는 날 나던 그 습한 냄새가. 나는 책에 나온 트레킹이 어떤 건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고 알 생각도 없었으나, 마치 폭풍의 언덕에 나올법한 그 풍경을 한 번 걸어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해리포터를 빼고 인생의 작품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폭풍의 언덕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특히나 히스클리프의 짙다 못해 찌질하고 처절한 사랑이 그려지는 언덕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걸었다. 축축한 풀과 사방에서 때려오는 바람 때문에 내 머리는 흐트러지고 치맛단은 젖었다. 대여기간인 2주 동안 집에서 오며 가며 그 책을 들춰보는 건 그 길을 걷는 나를 상상하게 하는 작은 기쁨이었다.
우리 여기 갈래? 가자!
지원이가 상기된 얼굴로 그 말을 꺼냈을 땐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설거지는 내가 사랑하는 소소한 즐거움인데, 그날의 설거지는 큰 기쁨이 되지는 못했다. 졸졸 흐르는 물에 접시를 비비며 뽀득하는 소리를 즐기는 대신,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 나와 같이 걷고 있는 건 나와 요크에서 만났던 친구들이었다. 책장을 넘기며 머릿속으로 지나던 축축한 숲길에 지원이는 없었다. 고마운 제안이었지만, 그곳에 지원이와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요망한 뇌는 막을 틈도 없이 산길을 걸어가는 나를 그리고 있었다. 비를 머금은 숲 향기가 코에 스치는 것 같았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무척 설렜다.
한 달 반 후에 출발하는 게 좋겠어!
겉으로 보이는 조용한 성격 때문에 나는 가끔 지원이의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잊고 지낸다. 아차 싶었다. 40일 후라니, 나는 왜 책을 반납 안 하고 지원이 눈에 띄게 했을까. 이미 머리로 대략적인 날짜까지 계산해버린 지원이를 멈추기는 힘들어 보였다. 복잡한 머리와는 달리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보니 내 마음도 이미 비행기를 타버린 것 같았다.
우리는 쉽게 들떴다. 지원이는 내가 글을 쓰기 바랐다. 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쩌면 다녀와서 트레킹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당장이라도 출판 계획이 생긴 것처럼, 여행에 관한 것만큼이나 책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눴던 것 같다. 오랜만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당장이라도 뭔가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었다.
어쩌면 너무 들떠 몇 가지를 잊었던 것 같다. 너무 즐거운 나머지 설거지가 어떻게 끝났는지 잊었던 것처럼, 나는 지원이에게 해야 할 말 하나를 잊었다. 사실 나는 정말로 산을 싫어한다.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