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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단단 Apr 10. 2023

악몽을 꾸는 소년

H.R 기거 (H.R. Giger, 1940 - 2014)


꿈에서 본 그것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매일같이 정체 모를 생명체가 등장하는 기이한 꿈을 꾼다. 이 생명체는 아름답고 신비하기보단 오히려 소름 끼치며 혐오스러운 괴기스러운 형상을 하고 있다. 끔찍한 악몽. 땀에 흠뻑 젖은 채, 공포로 얼룩진 밤을 보낸 소년은 자신이 보았던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내기 시작한다. 이를 지켜보던 소년의 부모님은 고민 끝에 결정한다. 소년을 병원이 아닌, 미술 학교에 보내기로.


소년은 정말 운이 좋다. 덕분에 소년은 또래로부터 고립된 생활 대신 긍정적인 환경 속에서 자라게 된다. 자신의 작품을 당당히 드러내고, 공유하며, 열렬한 지지와 응원을 받게 된다. 자칫하면 정신질환이나 정서적 문제로 오해받기 충분했던 소년의 그림. 소년이 망설이지 않고  모든  마음껏 발산할  있었던 , 이런 부모님의 영향 덕분이었다.


출처: artsy.net



스위스의 초현실주의 작가, H.R 기거(H.R. Giger). 그의 작품들은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독보적인 콘셉트로 우리를 매료시킨다. 앞서 언급했듯, 그의 작품 세계의 출발이 유년시절의 악몽이었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어떻게 이런 괴물이 등장하는 꿈을 꾸며 매일매일을 버텨낼 수 있는지 의문이 갈 만큼 공포스러운 광경이다.



출처: artsy.net



약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람의 두개골과 뼈, 해부학 등에 관심을 보였던 기거는 변형된 인간의 신체를 모티프로 한 개체들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현실과의 이질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화풍은 마니아 층을 제대로 자극했다.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던 생명체의 출현. 이런 독특함 덕분에 그는 전 세계적으로 역대급 흥행을 기록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에일리언(alien, 1979)’의 디자이너로 참여하게 되는 기회를 얻는다.



출처: talkfilmsociety.com




기계와 신체의 결합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어두운 곳만 찾아다녔고, 옷도 검은색이었다. 우리 집에서 제일 어두운 곳은 창 없는 방의 탁자 밑이었다.” (H.R. 기거 자서전 중)


기거의 작품을 아우르는 두 가지 요소는 바로 인간의 ‘신체’와 ‘기계’.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이 양극의 결합은 곧 기거만의 스타일이 된다. 영원히 공존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 둘은 기거의 작품에서 맞물리고, 게다가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이성에 관한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성별에 따른 외형적 특징과 성기를 본떠 작품 속 개체들을 디자인하기 시작한다. 머리와 입, 척추와 꼬리, 그리고 무엇보다 이 괴이한 신체를 유지시키는 점액질로 뒤범벅된 그들의 모습. 이 모든 형태와 방식은 인간의 신체의 성적 기능과 생식의 과정을 연상케 한다.


출처: anothermanmag.com
출처: artsy.net


기거를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게 만든 영화 <에일리언(Alien, 1979)>의 외계 생명체는 그의 첫 출판물인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영화의 감독인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은 영화 제작 당시 그 누구도 본 적 없던 미지의 괴물의 형상을 원했고, 기거의 작품을 보자마자 깊게 매료되어 스토리의 전반을 창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출처: anothermanmag.com



유한하며 생생한 인간의 신체와 무한 하지만 의미 없는 반복 속에서 맴돌 수밖에 없는 기계의 결합. 위험한 금기인 이 둘의 만남은 영생을 향한 욕망, 퇴화되지 않는 기능, 생명의 복제와 대량 생산 등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려 하는 여러 시도들로 이어졌다. 하지만 금기는 언제나 매혹적인 법. 작가 스스로 생물기계학적 (biomechanical)이라고 표현한 무명의 생물체들은 기계의 작동 방식을 차용하여 탄생과 번성을 이룩하게 된다. 생존을 위해 척추와 뇌에 연결된 기관들, 개체 수의 증가를 위한 생식이 모두 기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습이다. 기거의 세계관을 대표하는 특징은 바로 이런 생물과 무생물의 상호 작용이다.



출처: anothermanmag.com




공공의 적의 창조자


그는 에일리언 외에도 다수의 영화 속 외계 생명체들을 디자인했다. <폴터가이스트 2(Poltergeist II: The Other Side, 1986)>, <에일리언> 시리즈, <스피시즈 (species, 1995)> 등 불확실한 영역에 존재하는 생물체들의 모습을 탁월한 상상력을 이용해 재현하는 작업을 이어간 것.


그래서인지 기거의 작품엔 항상 미지의 공포가 스며 있다. 칩입자들은 사람의 몸을 숙주 삼아 기생하며 번식하거나, 매력적인 인간의 모습 뒤에 숨어서 먹이의 포획을 노리는 생존 방식을 터득하며 차차 발전해 간다. 인간의 적개심을 무너뜨리고 사회에 무리 없이 진입하기 위해, 관능적인 신체는 어쩌면 단시간에 상대를 매혹할 수 있는 효율적인 요소일지도 모른다. 허나 작가는 이걸로 멈추지 않는다. 파충류의 비늘, 하등 동물의 촉수 등을 합체시켜 개체를 신기한 모습으로 탈바꿈시킨다.



출처: anothermanmag.com



공공의 적을 손 끝에서 창조하는 기분은 어떨까? 우리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그의 머릿속엔 대체 어떤 풍경이 자리하고 있을까? 자칫하면 깊은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을 자신의 악몽을 예술로 승화시킨 H.R 기거. 어쩌면 예술은 초월적인 것의 부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필자: 주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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