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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 Jun 14. 2024

높이 날아 멀리 튀어, 동학

'살림'의 철학자 해월 최시형

동학을 창도한 사람은 수운 최제우지만 그 원리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한 사람은 해월 최시형이다. 최시형은 최제우가 순교한 뒤에 ‘보따리’ 하나 차고 도망 다니며 스승의 가족과 경전을 지켰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 최시형은 경전을 간행하고 조직을 지켜냄으로써 스승을 되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 동학의 기운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최시형은 순교한 최제우나 갑오년에 동도대장이 되었다가 잡혀 죽은 전봉준과 다르게 오래오래 끝까지 살아남았다. 사실상 몇 차례 조직이 괴멸되고 그 혁명적 정신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그는 그것들을 끝까지 지켜냈다. 멋지게 죽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망 다니더라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조직을 지켜내고 동학의 정신을 부활시킨 그의 공로로, 동학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민본사상을 발전시키고 민주주의를 지켜내며 민족 정신사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그것이. 포덕 36년을 해낸 뒤에 순교한 최시형은 동학을 대중화시켰고, 그것을 민중의 가슴에 뿌리내렸고, 마침내 미래의 삶의 철학으로 만들었다.     


김용옥은 말한다. 서양의 근대가 ‘신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이라면, 최시형이 자주 사용한 ‘사람을 하늘처럼 섬겨라(事人如天)’라는 용어는 신과 인간의 평등함을 전제한다. 최시형은 최제우의 ‘수심정기(守心正氣)’를 개인적 수행에서 사회적 ‘섬김’으로 바꾸었다. 그는 시천주(侍天主)의 관념성을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양천주(養天主)’의 생활양식으로 바꾼 것이다. 최제우가 사람의 내부에 담긴 신성을 찾아냈다면, 최시형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그것을 교육시키고 생활화하는 실천적 차원에서 하느님을 살린 것이다. 


최제우가 여종을 며느리로 삼고, 머슴 출신 최시형을 후계자로 삼은 것은 그의 혁명 정신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그는 관념적인 성리학자였고, 주기론(主氣論)을 주창한 형이상학자였다. 그가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은 영남 남인의 유학자였고, 적어도 한문에 능한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천자문을 뗀 정도인 최시형을 후계자로 삼았다. 한문에 능통해 후에 책을 저술한 강수나 박하선이라는 제자도 있었지만, 최시형을 택했다. 그것은 최시형에게서 동학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시형이 말한 ‘양천주(養天主)’라는 말에는 ‘부양’과 ‘교육’의 의미가 동시에 담겼다. 인간이 하느님의 신성을 품고 있어도 씨를 뿌리고 성장시키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느님을 개인의 내부에 모셔만 놓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자기 하느님을 죽이고 마는 꼴이 된다. 이때 자기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 사람들을 모아 교육하는 상태에서만 인간이나 하느님이 생성하는 존재가 된다. 그런 생성 속에서 한 인간이 성장하고 발전하며, 마을 전체를 하느님의 공동체로 만들게 된다. 최시형이 행위규범인 십무천(十毋天)에서 말하기를, 하느님을 상하게 하지 말고, 더럽히지 말고, 주리지 않게 하라는 말은 하느님을 보호하면서 공동체를 살리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그 말은 나라의 시스템을 뜯어고치자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길로 나아간다. 사회 변혁을 꿈꾼 손병희와 전봉준 같은 이들이 동학에 빠져든 것은 최시형의 이런 실천적 요소 때문이다.     


경주 검곡에서 화전을 일구던 최시형은 최제우가 사는 용담까지 백 리 길을 한 달에 서너 차례씩 배우러 다녔다. 최시형은 제지소에서 일하면서 천자문을 익혔는데, 『용담유사』를 완벽히 외웠고 『동경대전』을 자기 방식대로 소화시켜 기억했다. 그는 지극히 건강하며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최제우가 득도할 때 신내림 속에서 ‘영부(靈符)’를 받아 사람을 치료하고 가르쳤다면, 최시형은 아침저녁으로 찬 개울에 들어가 목욕재계하다가 문득 깨닫듯이, ‘겨울철에 찬물에 들어가지 말아라’ 정도의 천어(天語)를 들었다. 최제우는 최시형의 천어를 듣고 ‘조화’에 대한 체험이라며 높이 치며 후계자로 삼는다. 주문과 영성에 기울어진 최제우의 초월적 체계와 달리 최시형의 철학은 철저히 삶과 밀착된 것이었다. 최시형의 천어를 ‘무리하게 살지 말아라’ 정도로 바꾼다면, 그는 ‘신이(神異)한 이적’과 같은 것을 거부하고 합리적 실천의 길로 나선 지도자가 된다. 


최제우가 빨리 죽었기에 제2대 교주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조직을 아우르고 그 정신을 지켜내야 했다. 그렇다 해도 최제우가 최시형을 택한 것은 예언자적 감각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는 최시형에게 맨 처음으로 포덕할 권리를 주면서, 동학 번창의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는 ‘고비원주(高飛遠走)’ 하라고 당부했다. 멀리 달아나 살아남으라는 것이었다. 최시형은 34년간 도망 다니면서 붙잡히지 않았다. 끝없이 관군에 쫓겼으나 영남과 강원도의 산악지대로 달아났고, 화전을 일구던 솜씨로 산속에서 버텼고, 길도 없는 산속 깊이 숨어들어 살아남았다. 최시형은 기독교의 사도 바울처럼 동학을 조직화하고, 경전을 간행하고, 전봉준과 함께 혁명을 수행하고, 마침내 한반도 전역에 개벽의 불길을 불어넣었다.     


1871년 이필제가 교조신원운동을 핑계로 영해민란을 일으켰다. 최시형은 아직 그럴 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으나 제자들의 요구에 따랐다. 아무리 희생이 커지고 가혹한 보복을 당하더라도 제자들이 요구하면 끝까지 이야기를 듣고 토론하며 그것을 심사숙고해 결정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하지만 섣부른 봉기는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그는 다시 보따리 하나 둘러메고 줄행랑을 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그는 스승의 경전을 지켜내고 교조신원의 중요성을 잊지 않았다. 강원도 산악지대에 숨어들자 감시를 견딜 만했다. 강원도의 산은 깊고도 깊었다. 그는 언제나 짚신 삼으면서 달아날 지형을 살폈고, 새끼를 꼬고 화전을 일구면서 설법하며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는 포덕하고 수행하며 조직을 완비했다. 그를 보면 훗날 ‘대장정’을 벌인 모택동이나 지리산을 누빈 빨치산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를 안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입도했고 밀고하는 법이 없었다. 


최시형은 강원도에서 조금 안정되자 경전 간행과 49일 수련에 매달렸다. 1879년 정선에서 『도원기서』 필사본을 간행하고, 1880년 인제에서 『동경대전』, 1881년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스승의 말씀을 되새기며 수행을 할 때마다 열성적인 제자들이 늘어났고 조직이 더 단단해졌다. 최시형이 1872년부터 정선 무은담과 태백산 적조암, 마곡사 가섭암(공주), 미륵산 사자암(익산) 등지에서 여덟 차례 49일 견성수련을 하자, 그럴 때마다 함께 수련한 우수한 리더들이 배출되었다. 그때 세상은 서구의 제국들이 몰려들며 격동하고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이 이루어지자 일본과 청국의 세력들이 한반도에 침투했고, 1886년 조불수호조약에 의해 가톨릭의 종교활동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동학만은 사도로 금지되었다. 최시형은 경전을 간행하고 조직을 강화하면서 동학의 중흥기를 맞았는데, 몰락 양반들은 모여 『동경대전』을 스터디하고, 민중은 『용담유사』를 노래로 익혔다. 그것들은 무엇보다 소외받은 이들에게 광제창생과 후천개벽의 빛을 제공했다. 최시형이 익산의 미륵산 사자암에 4개월간 자리잡으면서 동학은 전라도에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전봉준,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같은 사람들은 개혁 운동의 필요성으로 동학을 받아들였다.     


호남에서 동학은 개벽의 조짐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그곳 민중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1891년 최시형이 전라좌도 편의장(‘포’의 대접주보다 위의 직책)으로 백정 출신 남계춘을 임명하자 전라우도 편의장인 윤상오와 김낙삼을 비롯한 16개 포의 대접주들이 남계춘의 신분을 문제삼고 나섰다. 최시형은 즉각 윤상오를 해임하고 남계춘에게 전라좌ㆍ우도 통합편의장 자리를 맡겼다. 호남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더욱이 동학은 공주에서 민회를 열면서 교조신원운동뿐만 아니라 ‘척왜양’과 ‘보국안민’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포접제가 잘 되어 순식간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공주에 오지 못한 사람들이 삼례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듬해 광화문에 엎드려 임금께 상소문을 올리자 동학의 위세는 왕실에까지 전달되었고, 그때부터 전봉준이 격문과 통문, 즉 현대의 대자보를 외국인 공관에 붙이며 대활약을 하자 동학교도들은 더욱 자신감에 넘쳤다. 보은에서 최시형의 3만명이 모이는 집회를 열자, 전봉준의 세력은 원평과 금구에서 수만 명이 모이는 민회를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갑오년 봉기로 연결되었다. 동학의 깃발과 농악대가 선두에 서면 백성들은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면서도 농민군은 관군보다 질서를 더 잘 지켰고, 심지어 행군하다가 쓰러진 벼를 세워주었고, 민가를 약탈하거나 짐승을 잡아먹는 일도 없었고, 집회가 끝나면 깨끗이 청소까지 했다. 그랬으니 백성들은 동학의 깃발을 보고 풍물소리만 들어도 쇠스랑이나 죽창 하나 들고 내달았다. 


전봉준은 언제나 최시형에게 연락을 취하며 협조를 구했다. 전봉준의 폐정개혁과 최시형의 생활철학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척왜양’과 ‘보국안민’, ‘다시 개벽’은 물론, 되도록 사람을 죽이지 않고 질서를 지키고 위생에 신경 쓰며 유무상자(有無相資)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것인데, 그래도 농민군은 어떤 상황에 처하면 죽음을 무릅쓰고 총칼 앞에 대들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지 원한을 가지고 양반들을 죽이자는 것이 아니었다. 최시형이나 전봉준, 김개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빼앗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호남의 동학장수들이 최시형과 불화하거나 거역한 적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면서도 서로 인정하면서 힘을 보탰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동학농민군이 전주화약으로 6개월 남짓 집강소 시대를 열었는데 그것은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과 대비시켜 볼 만한 일이다. 민중과 몰락 양반이 힘을 합해, 전봉준의 지도 아래서 집강소 안에서 ‘유무상자’를 실현했다. 호남 전역에 걸쳐 53개소 집강소를 실시했는데, 거기서는 모두가 깨끗한 복장으로 신분과 상관없이 상대방에게 예절을 갖추며 지역을 위한 정책을 논의했다. 그랬으니 그들의 지방자치 실험을 왕실에서도 수긍했고, 전봉준이 요구한 폐정개혁의 원리들도 대부분 갑오개혁으로 받아들였다. 그럴 정도로 집강소는 사람들의 다름을 인정하고 소통하면서 각자의 하느님을 키우고 살렸다. 거기서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모두가 함께 나누며 정성으로 대했다. 그것은 러시아혁명으로 만들어진 노동자들의 세상과 유사했다.     


일본과 맞서 싸운 우금티전투 후에 동학장수들이 다 잡혀 죽었지만, 최시형은 살아남았다. 그는 원주와 이천 부근에서 숨어 살면서 생태환경 위기에 걸맞은 독특한 삶의 철학을 세웠다. 그는 ‘양천주’의 논리를 발전시켜 “조상도 내 안에 있고, 모든 시작이 내 안에 있으니, 자신의 내면부터 섬겨라.”라는 ‘향아설위(向我設位)’에 대한 설법을 했다. 제사 지낼 때 벽에다 절을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혹은 내 안에 있는 하느님에게 절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야말로 조선 500년의 유교적 법도를 무너뜨리는 설법이었다.


우리의 근대 문명이 자연을 지배하고 타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가 지구를 위기에 빠트렸다면, 최시형은 ‘내 안의 하느님’을 섬기듯 주체를 찾으라고 말하지만, 또한 천지자연을 부모처럼 섬겨 생태 위기를 극복하라고 말했다. ‘천지부모’란 천지가 인간을 낳았고, 인간이 천지의 젖을 먹고 자랐으니, 자기만을 위하려는 마음을 제어하고, 남에게 양보하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자연성을 회복하고 더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최시형은 “밥 한 그릇에 모든 세상의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숭고한 노동으로 만들어진 우리 앞에 놓인 밥 한 그릇에 우주와 자연의 섭리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내 안의 하느님에만 빠질 일이 아니라 밥을 먹다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면, 그 밥을 만든 바람과 들판과 하늘, 그리고 그 속에서 뛰어노는 벌레와 새들까지 누릴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천지자연을 이루니 그 속에서 나온 인간이 그것을 받든다면, 인간은 ‘천지부모’와 조화롭게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살림의 철학을 최시형은 이미 100년도 전에 설파한 것이다.    

 

최시형은 1898년 7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그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 잡혀들어가 처형되었다. 그가 숨어서 천수를 누렸다면 얼마나 난감한 일이었겠는가. 최시형은 살기 위해서 잡혀들어간 것이다. 갑오년의 혁명은 동학농민군 이삼십만 명을 죽이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의병활동이나 독립운동에 나섰고, 죽은 자의 영혼은 3.1운동의 정신으로, 그리고 그 뒤로도 4.19혁명이나 5.18민주화항쟁, 6월항쟁과 촛불항쟁으로 되살아났다. 동학의 사상은 종교적으로 천도교, 증산교, 원불교, 통일교의 원리가 되었고, 그 뒤로도 수많은 종교의 뿌리가 되었다. 


김용옥은 최시형을 “우리 민족 정신사의 근원을 확립한 위대한 인격”이라고 평가한다. 최시형의 ‘원동학’의 정신은 실천적 철학으로서 여성 인권을 지키고, 어린이 운동(방정환)을 하고, 그가 마지막에 체포된 원주에서는 장일순의 ‘한살림운동’과 생명공동체운동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김지하의 ‘밥이 곧 하늘’이라는 생명사상이나 ‘율려운동’으로 나아갔다. 지금도 최시형의 ‘키움’과 ‘살림’의 철학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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