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다

군생활을 마무리하며

by 김인혁

7살 때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온 이후로 우리 집에는 TV 소리가 한 번도 들린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TV가 아예 있지도 않았다. 인터넷도 없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으론 9살 때 까진 컴퓨터로 게임도 했던 것 같은데 앞집 사람이 인터넷 선이 자기 집 앞에 거슬린다면서 잘라버린 이후로 인터넷도 우리 집에서 사라졌다.


부모님의 계획된 양육방식이었는지 아니면 경제적인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나는 강제로 디지털 금식이 몸에 밴 채 초중고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서 애들이 어제 본 드라마 내용을 떠들며 얘기할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집에 널리고 널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집에 있었던 ‘애들이 볼 법한 책’들을 다 읽었을 때쯤 부모님은 ‘어른 책’을 읽어 보는 건 어떻냐고 권유하셨고 그렇게 집에 있던 책이란 책은 다 읽고도 모자라 거의 매일 같이 새 책을 주문했다.


책을 읽다 보니 글이라는 게 쓰고 싶어 졌다. 가끔씩 보러 가는 영화 티켓을 A4용지에 삐뚤빼뚤하게 적은 감상평과 함께 파일에 모아두는 게 첫 시작이었다. 영화를 보다가 감상평에 쓸 좋은 문장이 생각나면 까먹을까 봐 조마조마하며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기곤 했다. 어른이 돼서도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A4 용지 대신 키보드나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며 각종 글을 쓴다는 점이었다.


책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는 게 좋았고 그런 이야기들을 직접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작가’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이 오랫동안 기억하는 글을 쓰고, 지나가는 타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입대를 할 때도 ‘그래 여기서 나중에 글로 쓸 만한 이야기나 많이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며 열정이 식지 않길 다짐했다.


그러나 교대근무라는 불규칙한 생활의 연속과 휴식이라는 꿀 같은 시간 동안 다른 뭔가를 하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한 해가 끝나갈 무렵 <HIM>이라는 잡지에서 병영 리포터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게 됐다.


군생활을 너무 무의미하게 보낸다는 조바심에 ‘뚜렷한 결과물이나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으로 병영 리포터에 지원하게 됐고 다행히 좋은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매달 다양하게 주어지는 주제에 맞춰서 글을 쓰는 게 즐거웠고 내가 쓴 글이 잡지에 실려 누군가가 읽고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달마다 주어지는 주제는 내게 작가로서의 사명감을 주었고 매번 다른 주제로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각의 폭도 넓어졌다. 하나 둘 쌓이는 글은 내 군생활의 일부들을 담고 있었고 가끔은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다.


병영 리포터는 지쳐있던 나에게 잊고 지냈던 열정을 지피는 불꽃이었다. 활동을 하면서 다시 영화 관련 리뷰를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쌓여가는 글들은 내 포트폴리오가 되어 나를 인턴기자라는 길까지 인도했다.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목표점에 도달해있었다. 모두 군생활 동안 이루기로 한 목표들이 있을 것이다.


그 목표들을 다 이뤄낸다면 너무 좋겠지만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자책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뭔가를 해보려고 도전했다는 사실 자체로 충분히 여러분은 박수받을 만하다. 남은 시간들이 여러분의 인생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끼치는 시간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