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무결함은 결핍으로 완성된다
아이언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 유독 우리가 좋아하는 슈퍼히어로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완벽하지 않고 인간적인 결핍이나 아픔을 지닌,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미숙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항상 고결하고 옳은 판단만 내릴 것 같은 슈퍼히어로가 빈틈을 보여주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줄 때 관객들은 비로소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는 슈퍼히어로와 자신 사이의 접점을 느끼고 그들에게 공감한다. 결점이야말로 슈퍼히어로의 서사를 완성시키는 마침표 같은 셈이다.
영화 <블랙위도우>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또한 바로 '결점'이다. 여성성과 가족, 바로 블랙위도우에게 결핍된 요소이자 캐릭터의 어두운 이면을 깊게 투영해내는 장치이다. 어렸을 때부터 레드룸에서 인간병기로 세뇌된 그녀는 자궁이 없는, 여성으로서의 성기능을 상실한 인물이다. 또 그녀에게는 가족조차 없다. 그녀가 가족이라고 믿었던 존재는 모두 각자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만들어진 '집단'에 불과하다. 영화의 흐름은 이 두 가지 결점을 어떻게 극복해내고, 영웅의 서사를 완성시키는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첫 번째로, 여성성의 부재를 블랙위도우는 자신과 같은 피해 여성들과의 연대로 극복해낸다. 옐레나를 통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여성들의 존재를 알게 된 블랙 위도우는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여성들을 남성의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실 영화의 설정이 굉장히 페미니즘적이지만 이 서사가 거부감 없이 납득이 됐던 이유는 바로 블랙위도우라는 캐릭터의 설정에 있다.
어렸을 때부터 살인 병기로 훈련받았다는 캐릭터의 설정과 함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영리하게도 그녀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들을 영화적 장치들-플래시백이나 인물의 직접적인 대사-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있다. 영화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얼핏 등장했던 블랙위도우의 과거 모습이나 영화 <윈터 솔저>에서 과거 임무 때문에 배에 난 흉터 때문에 비키니를 못 입는다는 대사를 통해 그녀의 여성성이 억압되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런 계산된 스토리 텔링 덕에 캐릭터의 서사가 분명해지고, 관객들에게도 영화의 메시지가 설득력 있게 다가온 셈이다. 블랙위도우라는 캐릭터를 통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스토리를 성공적으로 풀어낸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페미니즘적인 관점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드러낸다. 영화의 오프닝부터 아동 착취 현상이 연상되는 장면들을 다큐를 보는 것 같이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가 하면, 등장인물들의 직설적인 대사를 통해 관객들을 움찔하게 만든다.
"지구에 넘쳐나는 자원, 바로 여자들이지 (girls)"
한글 대사로는 '쟤네들'로 돌려 번역된 드레이코브의 이 대사는 <블랙위도우>가 가려는 방향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림자 뒤에 숨어서 세뇌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비겁한 '남성'빌런과 프로파간다의 희생양이 되어 다소 무식하게 힘자랑만 하는 마초이즘적인 '남성' 히어로. 이 둘의 존재가 바로 <블랙위도우>를 조금은 아쉽게 만드는 설정들이다.
철저하게 논리와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무장한 빌런 대신 페미니즘 갈등 구조를 위한 어설픈 악당 하나를 만들었다는 것과, 블랙위도우의 가족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영화의 개그를 담당하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전락한 '아버지'의 캐릭터는 오히려 페미니즘적인 메시지에 반감을 느끼게 만들고 풍부한 서사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영웅담을 정치적 메시지만을 전달하는 프로파간다 영화로 비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설정은 블랙위도우의 두 번째 결점인 가족을 극복해내는데도 아쉬움이 들게 한다.
옐레나와 블랙 위도우는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마지막까지 서로를 위해 희생하려 하며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고, 어머니 멜리나와는 대의를 위해 서로가 힘을 합쳐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아버지를 담당하는 레드 가디언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없다. 시종일관 힘자랑을 하거나 실없는 소리를 하는 등 마지막까지 영화의 개그 캐로 아예 전락했다.
가족의 부재라는 결점이 블랙위도우라는 캐릭터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생각하면 정말 아쉬운 캐릭터 설정이다. 남성 캐릭터 서사의 부재라는 점만 제외하면 페미니즘에 관한 훌륭한 비유들은 영화 전반에 존재한다.
등장할 때마다 자고 있는 남성 등장인물을 깨우는 여성 캐릭터의 모습은 페미니즘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방관하고 있는 남성들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해냈으며 하늘에 위치한 레드룸의 존재는 '유리천장'을 연상케 한다. 굳이 이런 페미니즘적인 렌즈를 빼고 보더라도 <블랙위도우>는 캐릭터의 서사를 훌륭하게 완성시킨 작품이다.
현재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페미니즘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이용해 캐릭터의 서사에 마침표를 찍고,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 제기까지 해내면서 지금까지 만들어진 페미니즘 영화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