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푸는 재주
한때 한국에서는 절대로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장르들이 있었다. 바로 오컬트와 SF 영화다. 다행스럽게도 장재현 감독의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가 국내에서 준수한 성적으로 흥행하며 '한국형 오컬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구축해내는 데 성공했지만 SF라는 장르는 불과 최근까지도 한국에서는 만들 수도 없고, 흥행도 보장이 안 되는 '독이 든 성배'같은 장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지난 5일, 한국 최초의 SF 영화를 표방하며 영화 <승리호>가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했다. 과연 <승리호>는 우리의 기대감에 올바른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영화일까.
때는 2092년, 황폐화로 죽어가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개발기업 UTS는 위성 궤도에 새로운 인류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영화는 시작한다. 지구를 떠나 우주로 이주를 한다는 디스토피아틱하지만 다소 흔한 설정을 전면에 내세운 것부터가 영화 <승리호>의 방향이 실험적인 시도가 아닌 안정적인 스토리라인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좋게 말하면 무난하게, 나쁘게 말하면 예상하는 대로 진행된다. 위대한 개척자로 신처럼 떠받들여지는 UTS의 창립자나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대량 살상 무기, 개인의 능력이 아닌 자본으로 나누어진 계급 등 전부 어디선가 본 듯한 설정들이 영화 <승리호>에서는 대거 등장한다. 이런 모방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한 데다 한국 최초의 SF 영화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기 위해 비교적 안전한 노선을 택했다는 것 자체는 오히려 비판이 아닌 옹호가 가능한 선택이다. 그러나 영화의 본질적인 문제는 한국형 신파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흔한 이야기를 굳이 거액의 제작비까지 들여가며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숲이 사라지고 흙먼지로 뒤덮인 지구의 모습이 화면에 등장한다. 곧이어 우주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태호(송중기)의 모습이 보이며 죽어가는 지구와는 정반대로 활력이 넘치고 화려해 보이는 UTS의 인류 공동체의 전경이 등장한다. 화면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이미 지구는 가망이 없으며 UTS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자 낙원처럼 묘사된다. 이 상반되는 두 장소를 연결하며 단순히 수직운동을 반복하는 엘리베이터라는 장치는 이미 이곳의 인류는 철저한 계급과 계급으로 분류되는 수직적인 구조의 미래사회임을 보여준다. 모두가 올라가고 싶어 하는 곳, 바로 UTS의 창립자인 설리반은 지구는 더 이상 인류의 고향이 아니며 화성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자신의 계획을 언론을 통해 어필하려 한다.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UTS와는 달리 외부 세계는 쓰레기로 뒤덮이고 온갖 국적의 욕설이 쏟아지는 그야말로 무법지대인 곳이다. 이런 무법지대에서 승리 호의 선원들은 우주 청소부라는 직업을 달고 우주를 떠다니는 쓰레기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승리 호의 선장을 맡고 있는 장 선장, 기관사 타이거 박과 작살잡이 로봇 업동이로 이루어진 승리 호의 선원들은 저마다의 개성이 넘치며 또 각자의 사연이 있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자칫 기술적으로 어색해 보일까 봐 걱정했던 업동이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러웠고 유해진 배우의 목소리와도 매칭이 괜찮았다. 진선규와 송중기의 연기 또한 배우가 장르에 성공적으로 몰입했다는 느낌은 받기 어려웠지만 영화를 보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준수한 연기를 보여줬다. 문제는 선장 역을 맡은 김태리였다. 올백머리에 선글라스라는 다소 과한 설정의 캐릭터 때문인지 배우가 컨셉에 갇혀서 숨을 쉬지 못하고 헤매는듯한 연기를 계속 보여줬다. 처음부터 끝까지 과한 연기톤이 영화를 보는데 방해될 정도였다.
반면 도로시로 등장하는 아역배우의 연기는 상당히 준수하다. 한국 아역배우들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하이톤과 영화의 흐름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사톤이 아닌 영화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정도를 지키는 연기가 아주 인상 깊었다. 사실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관계는 바로 승리 호의 선원들과 도로시가 유대감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이 관계가 관객들에게 충분히 납득이 되지 않으면 영화의 진행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감독도 이런 점을 알고 아역배우를 선택하는 데 공을 들인 것이 눈에 보였다.
승리 호의 선원들이 포획한 우주선에서 우연히 대량살상 무기로 알려진 도로시와 조우하며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도로시를 이용해 몸값을 뜯어내겠다는 계획이 실패하고 도로시가 로봇이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선원들은 도로시를 설리반의 음모로부터 지켜내기로 결정한다. 도로시의 정체는 불치병 치료를 목적으로 나노봇을 투여받은 평범한 아이였지만 뇌신경과 결합한 나노 봇들을 통해 다른 나노봇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과 그로 인한 식물들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였다. 도로시의 존재는 식물뿐만 아닌 주변 사람들, 승리 호의 선원들까지도 변하게 만든다.
각자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돈을 모으는데 집착했던 선원들은 도로시를 만나고 변하기 시작한다. 항상 술을 마시며 미래가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장 선장은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선 물불 가리지 않는 속물이었지만 도로시를 만난 후 자신이 잊고 지냈던 '정의'라는 게 무엇인지 깨닫고 더 이상 현실로부터 도망가지 않은 채 당당하게 총을 들고 싸우기로 각성한다. 선원들 중 유일하게 처음부터 도로시에게 호의적이었던 타이거 박은 도로시를 만난 후 문신까지 다 지워버리며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극복해낸다. 업둥이에게 있어 도로시는 순수한 아이의 시선대로 처음부터 자신의 존재를 편견 없이 바라봐 준 유일한 존재이다. 로봇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여성'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 또한 한국에선 보기 힘든 국제적인 이슈인 PC를 의식한듯한 설정이라 눈길이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태호에게 있어 도로시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신을 용서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꽃님이와 비슷한 또래의 딸아이가 있었지만 자신의 실수로 잃게 된 태호는 딸을 찾기 위해 누구보다 돈에 집착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태호에게 있어 도로시는 잊고 싶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이기에 태호는 처음부터 도로시에게 일부러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며 정을 주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도로시의 순수함에 태호는 마음을 열고 결국 도로시를 통해 자신의 딸과 조우하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성공한다. 결국 <승리호>를 관통하는 주제는 '순수한 아이로 인해 변해가는 속물 어른들'이라는 식상한 소재이다. 영화의 악역으로 등장하는 UTS의 설립자 설리반은 그 동기가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고 무작정 분노만 가득 찬 이해되지 않는 빌런으로만 비치고 영화의 스토리 진행을 위해 필요한 악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인물로만 등장한다.
자본으로 분리된 계급과 차별이라는 SF에 걸맞은 심오한 주제 또한 얼핏 얼핏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는 인간의 본성은 결국 추악하기에 선택된 인류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설리반의 가치관을 충분히 논리적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줘도 모자랄 판에 설리반이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은 채 20분도 되지 않는다. 다른 장면들은 필요 이상으로 길고 늘어지는 신파로 가득한 태호의 과거 회상 장면이나 선원들과 도로시 사이에 벌어지는 해프닝뿐이다. 설리반에 맞서 싸우는 검은 여우단은 전투 실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민간인 집단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스톰 트루퍼 효과를 제대로 누리는 승리 호의 선원들이다.
이미 결말을 정한 채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식의 스토리 진행은 후반부로 갈수록 그 약점이 드러난다. 아빠를 잃은 도로시의 감정 상태는 제대로 묘사되지도 않은 채 새 가족을 찾아다는 말 한마디로 끝나버리는 등 전형적인 가족영화식 엔딩을 보고 있으면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 비싼 제작비와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형식을 빌려야 했었나 의문이 든다. 물론 영화 <부산행>이 국내에서는 좀비물을 식상한 신파 영화로 만들었다며 국내에서 좋지 않은 평을 받은 것과는 상반되게 외국에서는 나름대로 흥행한 걸 보면 한국식 신파에 신물이 난 한국 관객들이라면 몰라도 넷플릭스를 이용하는 외국인 시청자들에게는 신선한 콘텐츠로 보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도시의 모습이나 여러 미장센들이 <레디 플레이어 원>이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같이 기존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인상이 들어 아쉽다. 물론 첫 SF 영화인 만큼 독창적인 컨셉 디자인이나 설정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국제적인 플랫폼인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만큼 외국 관객들에게 어필할만한 신선한 소재가 없다는 것이 치명적이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CG로 표현된 미래의 황폐화된 지구의 모습과 낙원으로 묘사되는 UTS 공동체의 모습 등 CG의 사용이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고 그럴듯하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실망하기는 이르다, 물론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를 논할 때 영화가 갖고 있는 그 의의만 두고 평가를 내리는 것은 결코 좋은 평론이 아니지만 <승리호>는 한국식 SF 영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증명한 영화이며 곧이어 제작될 한국의 SF 영화에 싫든 좋은 어떻게든 영향을 끼칠 주요한 작품이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승리호>를 시작으로 좀 더 퀄리티 있고, 메시지가 분명한 한국식 SF 영화가 쏟아져 나오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