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어진 장강명을 삐뚫게 보기

장강명, 『표백』

by 인현
과거 세대들은 민주주의라든가 자본주의 정착, 근대 체제로의 편입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과업도 이미 달성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양성평등이나 환경문제와 같은 거대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소주제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그다음에 나오게 될 이슈들은 한 세대의 과업이나 종교의 대용품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리라. 성적 소수자 보호, 동물 보호, 장애인 인권 문제, 소비자 운동, 저개발국 원조 프로그램 등등. 그래서 이 세대는 큰 꿈을 가질 수 없게 됐다.


장강명의 악명


장강명은 내게 익히 악명이 높다. 왜 악명이 높은가 하면 그는 내가 머리로 했던 발칙하고 공격적이며 다소 엉큼한 생각들을 소설로 내놓기 때문이다. 주로 한국 사회에 대한 냉혈한 통찰, 인간성에 대한 비꼼이 그 주제이다.


나로서는 이것저것 갖추고 청년의 끝자리 타이틀을 유지할 때 비로소 비판하고 싶었던 기성(旣成)에 대해, 기성세대의 건널목에 앉은 남성 작가가(장강명은 1975년생이다) 화자의 성별과 나이를 바꿔가며 자학하기 때문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당혹감이 있었다.


비유하자면 심혈을 기울여 기성을 깨고자 했던 중세의 젊은 기사가 아버지 뻘의 돈키호테를 보는 심정이랄까. 혹은 고려 중기 무신의 정변에 선수를 뺏긴 개혁파 문신의 심정이다. 즉 ‘펜보다 칼이 세다’류의 한탄인데, 장강명의 글은 칼로 세상을 해부하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더 이쁘게 쓰고자 했던 내가 반성이 된다.


물론 난 장강명을 좋아하는 편이고, 그에 비한다면 나는 지적 소시민에 불과하니 이런 비유는 자기비대증의 일환일 수 있다.



표백


다만 이 사회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과 태도는 내가 오래 견지해온 그것과 굉장히 닮았음은 사실이다. <표백>은 한국 사회의 20대로 살아가며 '과업'의 부재, '가치'의 부재, 삶의 당위성을 확보할 '윤리'의 부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집단 자살을 감행한 20대 청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에 따르면 한국의 2030 세대는 '패배'하지 않기 위한 교육을 받아왔으며, 역사적 과업은 이미 과거 세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꿈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는 《경험의 멸종》이나 《에로스의 종말》이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해 직시한 바와 유사하다.


기술의 발전과 과학의 진보는 삶을 연장하기 위한 편리한 기술만을 제공할 뿐, 삶의 이유에 대한 탐구를 앗아간다. 예컨대 건강은 생의 위협이라는 부정성을 통한 진보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표백'은 보다 더 정신적인 측면을 논하나 큰 틀은 동일하다. 표백의 청년들은 거대한 병동과 같은 한국 사회에 집단 자살이라는 부정성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독자의 곤조


독자로서 나는 크리스천이고 장강명이나 다자이 오사무와 같은 작가들이 '주인공'이라는 자신의 화신을 예수와 동격에 놓는다는 점에서 굉장히 불쾌하다. 둘 모두 기독교인은 아니나 역사와 철학적인 관점에서 성경에 대한 이해는 해박해 보인다.


눈치챘을테지만 두 작가 모두 주인공에게 '순교자 모티프'를 씌운다. 시대나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의도로.


표백, 116p

열두 사도에 대한 예수의 마음도 실은 자신과 비슷했던 것 아닐까? 정말로 그가 죽어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한 것이라면, 그 뒤에 제자들이 예수를 따라 순교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쨌든 그 불편함을 기점으로 에리히 프롬이나 한병철을 그 둘과 견주어 읽었다. 물론 나는, 장강명이 그의 저작을 불쏘시개처럼 여겨 이 시대 청년들이 각자의 자존을 찾아가길 바랐으리라 생각한다. 내게 그의 두 저작은 훌륭한 불쏘시개가 되었다.


결론적인 깨달음은 이렇다. 자존은 성과주의의 굴레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는 시대의 흐름과도 무관한 것이다. 나는 의견을 표함으로써 시대에 참여하지만 시대가 나의 자존을 흔들 수는 없다.


물론 전쟁이나 분단, 민주화가 최인훈과 같은 작가를 길러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한강이 노벨상을 받았듯 사유나 과업은 시대성을 초월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도 그랬다고 하더라. 자신이 남들보다 똑똑한 게 아니라 문제에 더 머물러있었을 뿐이라고. (물론 아인슈타인은 남들보다 월등하게 똑똑했을 것이라 생각은 함)


어쨌든 사유의 폭이나 시대의 과업은 스스로 정하는 것이지 남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위대해지고 싶으면 스스로 위대하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죽음을 택할 이유는 없다. 그건 타인의 해방이 아닌 자신의 해방을 위한다는 점에서 예수의 대속죄와 아무런 유사성이 관련이 없다.


수학자 아이작 밀너가 1794년에 남긴 말처럼, 계몽주의 시대의 걱정거리가 "높은 자리에 있는 위대한 자들이 자신들에게 영혼이 있음을 잊은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신들에게 몸이 있음을 잊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줄곧 지루함으로 표상되는 '일상'을 격하시키곤 한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내고 버텨낼 용기가 없는 이들에게 순교나 구원이 허락될 수 없다. 고요한 시대에 돌을 던지고 싶은 청년들이여, 일상을 살아라. 일상을 버티어 이기어 무대에 오르라. 그대들에게 몸과 삶이 있음을 잊으면 안된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