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지맞지 그 느낌적인 느낌 느낌
<미키17>은 살기위해 죽는 일을 택한 미래 소년 미키 반스의 일대기를 다룬다. 주인공 미키 반스는 맥도날드 이상의 잠재력을 지녔다는 꼬임에 넘어가 영끌한 마카롱 사업의 실패로 전기톱 능지처참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하고 (텍사스 전기톱을 향한 봉준호 감독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몰락한 정치인의 신행성 개척 우주선에 그의 몸을 대가로 몸을 싣는다. 만약 죽더라도 1주일 간격으로 백업된 기억을 새로 프린팅된 신체에 이식해 살 수 있다는 것을 안전장치로 미지의 우주/행성의 잠재적 위험을 파악하기 위한 마루타에 자원하게 된 것인데, 이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기 위한 자살을 시작으로 미키 반스는 이름(정확히는 성)을 잃고 넘버링으로 불리게 된다. <미키17>는 17번째 미키가 이름을 되찾기까지의 고분분투를 다룬 이야기, 이를테면 “미키17과 반스의 행방불명”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에서 미키 반스가 성(姓)을 상실했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이는 부모세대와의 근원적 단절을 의미한다. 미키 반스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물성, 다시말해 한때는 그의 어머니와 탯줄로 이어져 있었을 그의 신체는 그 스스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김으로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다. 이 이후 그의 기억(이란 워딩으로 소개된 ‘정신적 실체’)가 자리잡은 모든 신체들에도 배꼽은 존재했겠으나 이는 사실상 근거없이 복제되어 존재하는 것, 즉 장식에 불과하다. 그리고 남들과 구별짓길 원하는 인간들에게 이 근거없는 뱃꼽들은 타자화의 좋은 준거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블레이드러너>, <아일랜드>, <클라우드아틀라스> 등의 작품을 통해 확인했다.
이름의 상실, 내지 박탈은 필연적으로 인격 말살로 귀결된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름을 박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군대 훈련소와 교도소에서 훈련병과 수감자를 지칭할 때, 그리고 리얼리티쇼에 출연할 때 등이다. 이 장소들 (푸코의 개념을 빌리자면 사회와는 구별된 ‘헤테로토피아’들)에선 관리의 효율성과 편의성을 명목으로 진입하려는 이들의 이름을 박탈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관리자들이 원하는 바는 다름아닌 훈련병, 수감자, 출연자들의 사회인으로서 인격과의 작별이다. 마찬가지로 미키 반스의 사망 이후 그에게 부여된 일련의 시리얼 번호들은 인간성 소멸에 대한 은유이자 이후 그가 받게될 비인격적 대우에 대한 암시이다.
그렇기에 영화 내내 미키17을 따라다니는 “What is it feel like to die?”라는 질문은 비단 미키17을 향한 조롱 그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궁금증과 무지로 인한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이는 미키17을 비롯한 이전의 미키들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에 대한 기억, 즉 현대의학에서 정의하는 뇌와 심장이 기능을 멈추는 그 순간의 기억은 절대 백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키의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해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이 간단한 사실을 그의 동료들은 애써 외면한다. 이는 그들이 미키를 그들과 동일한 하나의 인격으로 보고있지 않기 때문으로, 따라서 “What is it feel like to die?”라는 질문은 여타 인간들과 미키를 구분짓는 근원적인 질문으로써, 그가 지닌 배꼽의 무용성을 빌미로 그를 하나의 인격으로 보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미키는 ‘다른 것(other thing)’이다.
문제는 최초의 미키 반스를 비롯한 미키17 이전까지의 미키들도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사실 조금은 논쟁적인 부분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미키1~미키16의 관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미키17의 관점을 따라간다. 영화에 소개된 과거의 미키들, 이를테면 우주선에서 손목이 잘린 미키나 니플헤임의 적대적 바이러스로 인해 피를 토한 미키들이 지녔던 생각이나 관점들을 우리는 알 수 없고, 다만 해당 기억을 물려받은 미키17의 해석에 기반한 설명들만으로 그 공백을 메워야한다. 문제는 미키17이 규범적인 개체(또 다시 푸코의 개념을 빌리자면 ‘유순한 신체’)라는 점인데, 이는 집단내 규율은 ‘성관계 금지’ 규칙을 깬 과거의 미키와 옥시조플 흡입으로 표상된 일탈적 미키18과 달리 미키17이 옥시조플 흡입을 문제시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행적을 통해 그들의 신념(내지 진정성)을 확인할 수 밖에 없으며, 이 것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이는 최초의 미키, 즉 자신의 복제 가능성을 믿고 자살을 실천에 옮긴 미키 반스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가 어떠한 신념을 기본으로 미키의 부활을 믿는지 그 신념의 시원을 알아보기 위해선 우선 시간을 과학적 사고방식이 탄생한 16세기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16세기 선조 치세 먼 나라 법국에서 태어난 69년생(역시 586은 위대하다) 데카르트는 어느날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악마가 내 모든 감각들을 조작할 수 있다면, 내가 느끼는 이 현실과 심지어는 내 자신이 실재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지?” 데카르트가 이 악마를 퇴마한 방법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의 육체적 감각과 정신적 이성을 분리해낸 심신이원론을 통해 데카르트는 신과 그의 피조물들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증명해냈고, 더 나아가 이성적 성찰을 통해 자연 세계 법칙을 알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현재 우리가 과학적 사고방식이라 여기는 모든 것들의 토대가 되며, 헤겔의 변증법, 칸트의 정언명령,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거쳐 마침내 니체에 이르러서는 신 마저 살해하는데 성공한다. 뉴턴의 역학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까지 현재 우리 삶의 기반이 된 모든 과학적 설명들과 이성적 판단들은 데카르트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미키 반스의 자발적 죽음과 (어디까지나 미키17의 관점이 투영된 해석에 불과하지만) 미키1~16의 노동으로서의 죽음들 인간이란 신체와 정신(기억)의 결합이라는 데카르트적(과학적) 설명에 대한 신앙을 기반으로한 종교적 순교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미키17의 신념이 깨지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유순한 미키17이 일탈적 18과 조우하며 그 스스로도 일탈적 존재(멀티플)가 되면서 부터이다. 미키18은 미키 반스의 신체와 미키1~16의 기억을 유산으로 받았음에도 미키17가 지닌 신념체계와 판단 양식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인사이드아웃>의 개념을 빌어 설명하자면, 미키17과 미키18은 동일한 기억을 지녔고, 그 속에서 일하는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소심이, 극혐이도 같지만, 기억을 통해 자라난 ‘신념’이 다르다.
미키17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불교적이다. 서구의 유물론적 세계관 저편엔 인도 베다 전통이 빗은 유심론적 세계관이 존재한다. 자이나교, 불교, 힌두교 등 일체유심조로 대변되는 유심론적 세계관에선 물질 보다 정신이 우선한다. 이 종교들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카르마(업보)와 윤회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여전히 더 나은 윤회를 위해 신체적 고행을 마다하지 않으며, 불교에서는 이 고통스러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탈 비법을 가르친다. 베다와 민간 신앙이 결합된 힌두에서도 성불을 추구하는데, 차이점이라면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통한 성불이라면, 힌두는 개인 수련을 통한 성불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얼핏보면 물질보단 정신적 초월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유물론과 배척되는 듯한 이 사상들은, 몸과 정신이 나누어져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한다는 점에서 같은 뿌리를 공유한다. 즉 사실 베다 세계관의 인도 종교들, 이를테면 자이나교, 불교, 힌두교 등에서도 심신이원론은 아주 익숙한 개념이며, 유물론과 유심론은 심신이원론이라는 제우스가 낳은 아폴로와 다이애나 두 쌍둥이 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만큼 유물론적 자본주의와도 사이가 제법 괜찮은데, 이는 ‘스트레스 관리법’, ‘명상’, ‘힐링’, ‘마인드 컨트롤 비법’. ‘소확행’ 등의 상품으로 변신해 절찬리에 판매 중인 작금의 상황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물론과 유심론은 현재에도 적대적이고 상호보완적으로 공생하고 있다. 유물론적 신앙에 근거해 죽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미키17이 동시에 불교적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이다.
미키17은 우주선 외곽에서 인간 신체의 방사능 내구성 테스트를 수행하다 손이 잘린 상황에서 이 모든게 자신이 어린시절 과학 시간에 개구리를 괴롭혔기 때문이라 되뇌인다. 그의 삶이 복잡하고 고난으로 가득찬 순간마다 그는 과거 자신의 카르마(업보)를 돌려받는다 생각한다. 만약 미키 반스와 미키1~17까지의 인격체들이 연속적인 것이 아닌 단절된 개별의 인격체들이라면 미키 반스와 미키1~16이 미키17의 전생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 가능하기에, 이 관점은 더욱 더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미키17에게 미키18은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카르마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 지점이 <블레이드러너>, <클라우드 아틀라스>, <아일랜드> 등 복제인간 문제를 다룬 여타 SF 명작들과 구분된 <미키17>만의 독창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미키17과 미키18이 조우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복제인간 내러티브에서 벗어나 도플갱어 내러티브로 도약한다. 도플갱어 내러티브는 ‘진정성’ 문제를 제기한다. 미키17의 나레이션을 지속적으로 따라왔던 관객들은 자연스레 미키17을 지지하게 되지만, 사실 두 미키 모두 나름의 정통성을 지닌 독립된 개체들이다. 이 문제는 (영화에서도 소개되듯) 필연적으로 책임 소지의 문제와 결부되기에 중요하다. ‘만약 미키17과 미키18이 이토록 다르다면, 이전의 미키들과 미키17은 과연 동일인일까?’라는 질문을 남기는데, 이는 나샤가 말한 이전 미키들만의 특성, 나샤와 카이 간 미키 나눠먹기 논쟁, 미키 스스로의 반문 등을 통해서도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다. 만약 각 미키들이 다 자신만의 개성을 지닌 독립된 개체라면, 미키17와 미키18이 어째서 미키 반스의 채무불이행에 책임을 져야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의문이 남는데 이를 영화에서는
무엇보다 미키17의 몸은 그의 정신적 기억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신체엔 관자놀이 총상이 없으며, 손목이 잘린 흉터 내지 실험으로 인한 주사자국들이 남아있지 않다. 이는 즉, 기억 이식으로 인한 일종의 ‘부활’이라는 개념은 사실 불완전한 미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인간 이성에 대한 예찬에서 시작된 심신이원론과 유물론적 세계관이 인간 소외와 생명 천시 그리고 인간성의 소멸로 귀결된다는 점을 봉준호 감독은 <괴물>,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 등 그의 작품 세계를 통해 끊임없이 경고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미키17>에서도 매번 실패만 하는 대체로 무능한 과학자들을 통해 해학적이고 은유적으로 제시된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로 봉준호가 제시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죽음이다. 영화의 마지막 복제기를 폭파하는 장면은 기술적 진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 인간성을 되찾는 과정에 대한 상징으로, 이를 통해 미키17은 17이란 시리얼 번호를 떼고 비로소 인간성을 회복하게 된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이 꿈보다 해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을 해몽하는 즐거움이 영화라는 매체가 선사하는 가장 큰 즐거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