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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닙 Jul 12. 2022

여권에 도장이 꾹!

여행이 삶의 가장 큰 꿈이자 행복인 사람들을 셀 수 없이 만났다.


내게 여행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사실은 ‘여행’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걱정이 앞선다. 걱정이 많은 편이라 결심이 어렵다.

걱정이 워낙 많아 물에 빠져도 가라앉을 것만 같다.
수영장에 두 번 등록하고 수영 배우기에 도전했지만 여전히 물에 뜨지 못하는 이유인지도.

  
익숙한 생활 반경을 벗어나는 데다 생전 밟아본 적 없는 새로운 땅을 밟아야 한다니.

여행은 설렘과 공포를 동시에 준다.

동네를 걷다 집 가는 길을 지나쳐 다른 길 위에 멈춰 서거나 낮에 수백 번 오가던 길 위를 밤에 지날 때가 있다. 해외로 출국하는 일은 온전히 즐거웠던 일이 결코 없다.

보통 가볍게 카페로 외출할 때, 노트북과 책 한 권 혹은 두 권, 그리고 노트와 펜, 우양산을 챙긴다.

노트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지만 언제 두고 온 책을 후회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거의 다 본 책을 마저 읽고 서운해지면 이어서 다음 책을 읽어야 하므로 어느 날은 두 권이 될 수도 있다.

우양산은 햇빛이 강하거나 비가 내리는 모든 환경에서 나를 지켜낸다.

천재지변으로부터 보호받은 하루, 우연히 떠오른 영감에 글까지 쓸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하하, 완벽해!

현실은 챙긴 것 중에 하나라도 알차게 쓰고 집으로 돌아오기 어렵다.

휑하고 허탈한 마음과 결린 목과 어깨. 무거운 가방에 비해 얻는 것은 미미하다.

뭔가를 두고 온 기분까지 들 지경이다.


국내 일박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에는 짐을 싸는 시간보다 짐을 싸는 상상을 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

물먹은 거대 곰 인형처럼 무거운 배낭의 지퍼는 새벽에도 손톱깎이나 작은 헤어롤 따위를 욱여넣느라 다물 새가 없다. 사막으로 떠나는 여행도 아니고 쇼핑이 불법인 나라로 출국하는 것도 아닌데, 없을 때 아쉬운 물건이 생길 새를 예방할 유일한 기회 같다. 그런 날은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커서 잠도 잘 오지 않는다.

이런 내게 해외 입국이란 악몽보다 한 수 높은 가위눌림에 가깝다.

캐나다, 미국을 돌고 다시 귀국하는 여행 일정을 잡았을 때는 사건 사고들을 찾아보느라 오랜 시간과 마음을 썼다. 걱정이 기우가 아닌 게 증명된 경험까지 있다.

실제로 2017년 라스베이거스 총격 사건 이틀 뒤 그곳에 방문했었다. 우버 기사님에게 “그날따라 아내가 집에 빨리 오기를 부탁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 자리에 없을 것”이라는 오싹한 이야기를 들으며 긴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다음 해 일본에 갔을 때는 태풍이 와서 관광지는 침수되고 공항은 폐쇄되었다.

유달리 여행객 괴담이 많은 외국 여행이 결정되면 양껏 걱정할 수 있는 소재들이 조약돌처럼 퐁당 던져진다.

입국 심사대에서 입국이 거부된 경험담. 차량에 가방을 두고 자리를 비웠더니 창문을 깨고 통째로 훔쳐 갔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은 직접 목격한 일처럼 선명하다.


괴로운 상황을 끊임없이 가정하다 보면 여행은 공포가 된다.

비로소 별일 없는 현실로 닥친 후에야 긴장이 놓인다. 긴장이 놓이면 그제야 설렌다.

타고난 여행자들은 설렘이 훨씬 크기에 여행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한 걸까.

탁한 걱정을 거른 순도 백 프로의 설렘을 삼분의 일 정도만 나눠 갖고 싶다.


스물아홉의 나는 서른 살이 되면 더 많은 나라에 자유로이 입국하는 찐 어른이 되어야지 결심했다.

서른이 되던 해, 신종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무력화했고 어느 나라에도 출국이나 입국을 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도 컸지만, 덕분에 열 번 분량의 걱정을 덜어냈다.

각국의 입국 제한 및 격리 조치가 완화된 요즘, 공항에 여행객들이 몰려 비행깃값이 비싸졌다고 한다. 난 아직 아무런 여행 계획이 없는데 한발, 아니면 다섯 발 정도 늦었나 싶다.


입국이라고 발음하면 여권에 도장이 꾹 찍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입-꾹!


입 꾹 다물고 있지만, 낯선 나라의 입국 심사대를 지난 일을 이야기하는 상상만으로 간질간질하다.

근질근질하기 전에 입국할 나라를 물색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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