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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리 Dec 24. 2020

내 머릿속의 사전

한 단어가 갖고 있는 수많은 의미


내 머릿속엔 사전이 있다.


사전은 말 그대로 개정이 쉽지 않다. 한 번 등재되면 그 의미가 거의 바뀌지 않는다. 내 머릿속의 사전 또한 마찬가지다.


극성


나의 언짢음은 '극성'이라는 단어에서 시작됐다. 나보다 먼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동생이 내게 한 말 때문이었다.


"언니는 언니 자식 낳으면 나보다 더 극성으로 할 걸?"

"언니는 진짜 극성으로 키울 거야."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그것도 한 달에 걸쳐서) 말했다. 나는 세 번이나 꾹 참았다. 사실 처음에는 그냥 듣고 넘겼는데, 두 번 듣고 세 번째 들으니 기분이 나빠졌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를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고민 끝에 아무래도 이건 한번 말하고 넘어가야겠다 싶어 날을 잡고 이야기를 했다. 이왕이면 내게 거슬리는 저 말은 앞으로 피해 줬으면 하기도 했고.


그러자 상상한 적 없던 답이 돌아왔다.


"나는 육아책도 안 읽고 아무 대책도 없이 그냥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 같아 한심하게 느껴졌어. 그런데 언니는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많이 해서 똑똑하게 잘 키울 것 같아서 했던 말이었어."


극성


내 사전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등재되어 있는 단어. 그래서 나는 부정적으로만 이해하고  하지만 동생에게는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였다.


혼자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어떻게 긍정적인 의미일 수가 있지? 그래서 진짜 사전을 힘을 빌려 '극성'의 뜻을 찾아봤다. 

아, 동생은 1번으로 나는 2번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얼마 전 쓴 글(『보통의 언어들』)에서 나는 뉘앙스에 민감한 사람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왜 그렇게 민감해요?라고 묻는 사람에게 약간의 부연 설명을 하자면, 번역 일을 하다 보니 그렇다. 단어 선택 하나하나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어를 우리나라말로 번역을 하려면 옵션이 무궁무진하다. 한국어에는 동의어들이 아주 많다. 그래서 그 동의어들 속에서 가장 어울리는 하나를 찾아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 있다. (물론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일상생활에서도 나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모든 문제는 이 과정의 결과물을, 즉 단어 선택을 하는 기준을 남들에게도 적용할 때 나타난다. 일을 할 때야 당연히 엄격한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그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의 이 높은 기준을 충족시키며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내 주변에 몇이나 될까?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정말 운 좋은 거고, 한 명도 없다고 전제해야 한다. 사실 한 명도 없는 게 당연하다.


예쁘게 말하고 싶은 마음에 이왕이면 더 예쁜 표현을 찾아 말했었다. 항상 '아 다르고 어 다르니까'를 마음속에 새기며. 이왕이면, 이왕이면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다정하고 좀 더 친절한.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나로 끝내야 한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상대에게까지 바라는 기대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내 머릿속 사전은 국립국어원이 편찬한 국어대사전이 아니다. 사람 개개인이 갖고 있는 사전은 저마다 다르다. 같은 사전이란 존재할 수 없다.


내 사전의 뜻을 너무 고집하지 말고, 다른 뜻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그리고 생각보다 별 뜻이 없는 단어가 있을 수 있다는 거.

그리고 나는 특별한 뜻을 부여했지만, 누군가는 뜻 자체를 부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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