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바르

기억 보관소

by 이니마

조금씩 짙어지는 익숙한 냄새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통과하는 중이다.

어두운 복도 끝에 다다르자 더 큰 공간으로 열린다.

실내는 흡사 연극무대 안에 들어선 것처럼 어떤 긴장감이 느껴진다.

중앙의 커다란 어떤 구조물이 서있고 나는 위성처럼 주위를 천천히 돈다.

따뜻한 어둠이다. 어둠이기보다 그늘 같다. 정원으로 난 유리문으로 햇빛이 들어와 그림자들이 흐릿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팔의 피부 안쪽으로 따뜻한 감촉이 느껴진다.


이곳 라바르는 오래된 목욕탕을 개조한 공간이다.

바깥에서 보면 높다란 굴뚝이 솟아있어서 금방이라도 연기를 피워 올릴 것 같다.

내부 역시 오래된 장소의 흔적들이 보인다.

다시 그 커다란 무대의 장치 같았던 구조물을 본다.

공간은 들려줄 어떤 얘기가 있다는 듯 뜸을 들이는 중이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형태가 독특하고 미묘하다.


타원형의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기둥에 은색의 금속 테이블이 커다란 잎처럼 붙어있다.

그 밑을 커다란 구체가 지지하고 이와 조응하듯 조금 작은 구체가 한쪽 벽의 선반에 위치해 있다.

타원형 기둥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물줄기가 금속 테이블에 좁게 패인 홈을 따라간다.

그 홈은 마치 복숭아의 배선을 닮았다.

물줄기는 테이블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조용히 흐르다 아래로 낙하한다.

그 물줄기를 받아내는 것은 파랗고 작은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된 타원형의 오래되어 보이는 공용 욕조다.

욕조에 낮게 고인 물 위로 동그란 파동을 만든다.

파동은 점점 커지고 나는 이내 다른 세계로 미끄러져 간다.

물의 줄기는 점점 굵어지더니 밸브가 달린 금속 파이프가 나타난다.

두 개의 파이브에서 온수와 냉수가 동시에 쏟아지며 욕조를 가득 채운다.

김이 피어오르는 욕조 안에는 서너 명의 여자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두른 채 입을 꼭 다물고 있다.


두 개의 이야기


하나,

10살 무렵, 일요일은 느지막이 아침밥을 먹고 어김없이 목욕탕에 간다.

그날은 언니들과 서로 싸웠어도 화해해야만 하는 날이다.

손이 닿지 않는 내 등의 청결을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가장 좋았던 순간은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 순간이다. 특히 겨울에는 더 그렇다.

서로 등을 밀어주고 문을 열고 나오면 느껴지는 공기의 상쾌함. 더할 수 없이 좋다.

차가운 바람에 볼의 열기가 달아오른 게 느껴진다.

달달한 요구르트 마시며 집에 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슬슬 풀려나온다.

집에 돌아와 두텁고 묵직한 솜이불을 들추고 아랫목으로 들어가면 따뜻하다 못해 뜨끈하다.

매우 평범한 일상이었으나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다.


둘,

이 건물은 서귀포 항 근처에 있어 3층으로 가면 새섬과 문섬을 조망할 수 있다.

현재는 주변들이 관광지로 많이 알려져 여행객들도 많이 오간다.

이곳이 내게 특별한 이유는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곳이어서 다.

근처 서귀포 극장과 조금 떨어진 천지연 폭포, 도서관과 미술관, 매일 시장과 학교, 미술학원들을 오갔던 곳이다.

아마 이곳 라바르 이전의 목욕탕도 한두 번 온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회상들 속에서의 유희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리고 망각의 속도를 늦출 수도 있지만 어쩌면 완전히 잊고 있었던 기억의 파편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세 번째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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