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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지하다 Mar 03. 2023

안녕 서울촌년!

서울에선 동네는커녕 집 밖은 잘 벗어나지 않는 나.

자취를 시작한 뒤 내 취향대로 꾸민 5평의 작은 공간이 아늑한 아지트가 되어 집순이로 돌변한 것도 있고,

올해부턴 불필요한 모임을 모두 줄이고 조금 더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자 하는 이유에서다.


그러다 무려 평택에 갈 일이 생겼다. 충청도 기준으로 경기도의 최전선 도시. 가본 적 없다.

가진 차라고는 루이보스차뿐인 내가 카카오맵으로 보니 대중교통으로 2시간 20분이 걸린단다.

왕복 5시간...

5시간이면 한국에서 베트남까지 날아갈 수 있는 시간이다. 승무원인 나의 시간 계산 방법은 주로 이렇다.

평택에서의 볼일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1시간이면 충분할 텐데... 5배의 투자를 해서 다녀와야 한다니.

지하철에서 300페이지짜리 책 한 권을 뚝딱 읽을 수 있을 만큼 길고 지루한 여정이 될 터였다.


그런데 아침에 눈 뜨니, 너무나 반가운 친구의 메시지!

내가 오늘 평택에 가려던 걸 알고 있던 친구는,

송탄 부대찌개가 너무 먹고 싶다며 자신이 운전해서 같이 갈 테니 부대찌개를 먹자고 했다.

나는 친구의 차로 가면 훨씬 편할 테니, 부대찌개는 내가 기쁜 마음으로 사겠다고 했다! (운전을 해도 차가 막히면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는 건 그땐 알지 못했다...)


그렇게 서울을 지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달리다 지루해질 즈음, 드디어 표지판에 평택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우와, 그런데 이 친절한 표지판은 심지어 "안녕 평택"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서울을 빠져나올 때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이나 <어서 오십시오 -파주-> 이런 단독 표지판은 본 적 있지만, 이렇게 인사말과 방향, 거리가 같이 나온 표지판은 처음 본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존댓말이 아닌 "안녕? 평택"이라는 친근한 말투에 신기해서 친구에게 말했다.

"드디어 곧 평택인가 보다, 안녕 평택이래!!!"


얼마 안 가, 다시 그 예의 표지판이 또 나왔다. 이번에도 안녕 평택?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표지판을 들여다보던 나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말이 짧은 게 이상했다.

안녕? 평택!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혹시 저 '안녕'이 지명일 수도 있을까...? 들어본 적 없는데...? (나는 한국의 많은 지명을 들어보지 못했다.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11년을 지냈다는 핑계를 대 보지만, 사실 나는 한국에 살 때도 서울촌년이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말했다.

"저 안녕이, 인사가 아니라 지명인가 봐. 하하하하하 진짜 웃기다!" 

정작 웃기는 건 나 자신이었거늘... (진지하고 정확해야 할 고속도로 표지판이 반말로 "안녕 평택?"이라고 말했다고 생각한 나는, 우리가 지금 평택에 가고 있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모든 것을 내 위주로 생각하는 확증 편향에 빠져, 내 감각에 입력되는 정보들을 자의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이 글을 쓰기 위해 '안녕'이라는 지명을 검색해 보니, 경기도 화성시에 '안녕동'이라는 지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평택에 도착했고, 나는 처음 발 디디는 도시에게 속삭였다. '안녕 평택?'

평택은 이렇게 대답하는 듯 했다. '안녕 서울촌년?'


그리고 듣던 대로 부대찌개는 맛있었다. 또 올게, 안녕 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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