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 전 지구적으로 저녁을 먹기에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간,
며칠 전 엄마가 준 참나물을 볶고 있었다.
나물도 프라이팬에선 삼겹살만큼이나 커다란 지글지글 소리를 내는구나ㅡ라고 생각하던 찰나,
정겨운 프라이팬 속 오케스트라를 뚫고 더 커다란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엄마인가?' 하며 화면을 바라보니 010으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였다.
낮 시간이라면 모르는 번호는 스팸이겠거니 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저녁 시간에 오는 전화라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ㅇㅇㅇ님 맞으실까요?"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여기는 OOO 결혼 정보 회사입니다."
'도대체 어떤 회사에서 내 번호 팔아버린 거야!!!'
지글지글지글~ 나물에 묻어있던 수분과 올리브 오일, 열이 삼중주로 내는 소리에 귀가 따가웠는지, 전화기 속 상대편은 전화 건 목적을 말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
물론 그녀가 전화를 건 목적은, 초코파이 광고음악이었다. 말. 하. 지. 않. 아. 도. 알~ 아요~
나는 그녀의 짧은 침묵을 뚫고 먼저 선수를 쳤다.
"아, 제가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요~"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인생의 동반자를 찾아가는 것에는 무척 관심이 있지만 그것이 꼭 결혼이라는 제도로 귀결돼야 한다는 것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굉장히 친절했고 어딘지 모르게 초보임이 느껴졌는데, 이 시간에 전화를 거는 걸 보니 아마 주어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야근을 해야 하는 처지인가 싶어서 괜스레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누가 저녁 시간에 전화를 해, 광고성 전화를!!!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는데... 요리 중이었으니 봐준다.)
"아, 결혼엔 관심이 없으세↗요↗?"
"네, 없어요~"
"왜 결혼에 관심이 없으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이 여자, 선 넘네? 내가 생면부지 전화기 너머 당신한테, 왜 서른다섯이나 먹은(한국나이로 37) 한국인 싱글 여자인데도, 결혼에 관심이 없는지 설명을 하라는 거니 지금?'
하지만 나는 서른다섯이나 먹은 한국인 싱글 여자인 만큼, 이런 대책 없는 질문에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제가 레즈비언이라서요~"
" 아 레즈비언이세요↗?" (모든 내 대답을 친절한 여자 목소리로 반복해 되묻는 로봇 같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뚝.
결혼정보회사 전화는 처음 받아보았기에 일부러 이런 대답을 준비해 두고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오직 그 말만이 그녀의 구구절절한 추가 설명을 피해 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런 번뜩이는 재치를 부린 나 자신이 대견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효과만점이었다.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모든 여자는 레즈비언이 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고, 전 남자 친구 중 한 명이 누누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남자도 게이가 될 가능성이 잠재된 것 아냐?
전 남자 친구 말의 근거나 사실 여부를 떠나 최근 나는 가끔 나에게 물곤 했다.
'나는 나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101% 확신할 수 있나? 그렇다면 그 근거는?'
없다.
그동안 남성들하고만 데이트를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101% 레즈비언이 아니라고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여성과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을 뿐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내 친구는 나의 범성애자 가능성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아직까진 남자가 좋다.)
성정체성은, 개와 고양이 중 무엇을 더 좋아하는가와 같은 정도로만 취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부인권은 성정체성에 의한 차별을 옹호하지 않는다. 담배가 당신의 기호식품이라고 해서 당신이 담배성애자가 되진 않는 것처럼 내가 심지어 여자를 좋아한다고 한 들, 그것은 나의 선호일 뿐이지 '나라는 사람'을 규정짓는 모든 것은 아니다. 나의 많고 많은 취향 중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정체성'을 그 사람의 전체 아이덴티티로 규정짓고, 프레임을 씌우거나, 종교를 운운하며 동성애는 죄라는 둥의 말을 한다. 예수의 열두 제자가 모두 이성애자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베드로가 동성애자였다고 해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을 것이다.
나는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가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주어 좋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 저희가 레즈비언을 위한 매치도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어떤 여자 타입을 선호하시는지 알려주시면 저희가 매칭을 준비해 보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그런 날이 오길 바란다. (그런데 그때도 내가 싱글이라면, 난 무슨 핑계를 준비해야 하지? "전 사실 인간이 아니라 AI입니다."라고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