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의 길다면 긴 발리여행을 마치고 어제 아침에 집에 돌아왔다.
(아직 발리여행 3無 시리즈를 마저 적어야 하는데 일단 이 글부터 쓰기로 했다.)
발리 여행을 떠날 땐 보일러를 끄고 가는 걸 까먹지 않도록 메모해 놨을 정도로, 보일러를 켜고 지낸 날씨였는데 다녀와보니 벚꽃이 여기저기 만개해 있고 공기에서 확연한 봄이 느껴졌다.
겨울 막바지에 여름으로 피신을 다녀왔다가 돌아오니 봄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집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커튼을 열고, 발코니 창을 열고 5평 남짓 원룸의 환기를 시키는 것이었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일상의 안온함을 환기시키며 남향인 집을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발코니 너머로 해를 올려다보느라 못 보고 지나친 건지, 아니면 내가 짐을 풀고 빨래를 돌리는 사이에 와서 죽은 건지, 오후 즈음에 다시 발코니를 내다보니 죽은 새가 한 마리 있었다. 발리에서 지나가는 송충이만 봐도 철렁 내려앉는 약심장인 나는 새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심장이 덜컹했다.
내가 휴가 간 동안 죽어있었던 건가? 18일이나 다녀왔는데, 냄새는 나지 않는 걸 보니 최근에 죽은 것 같다.
다행인 것은 굉장히 작은 새였다. 큰 새가 죽어 있었다면 얼마나 더 놀랬을까.
불쌍한 것... 왜 죽었을까?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 새가 많다고 들었는데 혹시 우리 집 창문에 부딪쳐 죽은 건가 했는데, 창문은 내가 커튼을 쳐두고 가서 투명색이 아니라 분홍색이라 그랬을 것 같진 않은데. 뭔가를 잘못 먹었나?
길에서 죽은 새는 종종 보았지만 하필 내 발코니에서 죽었으니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친구는 관리사무소 직원을 불러 치워 달라고 하라 했고, 엄마는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묻어주라고 했다.
쓰레기통에 버리는 건 왠지 한 생명의 죽음에 대한 처리 방식이 아닌 것 같았고, 이 넓은 지구에서 하필 내 집 발코니에서 죽었으니 책임을 가지고 묻어주기로 결정했다. 5분 거리에 사는 엄마네로 가서 엄마랑 같이 묻기로 했다. 엄마가 새를 봉투에 넣어서 가져오라고 해서, 왼손엔 두꺼운 면세품 비닐백을 들고, 오른손엔 두꺼운 엽서 한 장으로 새 밑을 쓸어 봉투에 넣었다. 비닐백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안 들어가서 세 번만에 성공했다.
엄마가 자신의 아파트 뒷 화단에 낫으로 땅을 파고 새를 묻었다. 원래는 나무젓가락으로 십자가를 만들어줄까 했었는데, 나는 더 이상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5년 전 나는, 30년간 믿었던 종교를 버렸다.) 십자가 대신, 발리에서 사 온 재스민 향 인센스 스틱을 두 개 피우며 편히 쉬라고 말했다.
새를 묻고 난 뒤, 이 새가 많고 많은 곳 중 하필 내 집 발코니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발리에서 나는 새들 덕분에 정말 즐거웠다. 늘 새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기 때문이다. 숙소에서도, 산책을 할 때도, 요가를 할 때도 새소리가 들렸다. 나는 '새가 운다'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아름다운 소리에 '울음'을 갖다 붙이는 것이 싫어서이다. 발리에서 새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연이 주는 멜로디에 감사함을 느꼈다. 내가 발리에서 새들을 통해 기쁨을 느꼈으니, 이 새 한 마리를 우리 모두가 태어난 흙으로 돌려보내라는 미션을 우주가 나에게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 이상 종교는 없지만, 나는 자연과 우주의 에너지를 믿는다. 새의 영혼이 거처하던 몸은 죽었지만, 새의 영혼이 담긴 에너지는 아마 다른 곳으로 옮겨 갔을 것이다. 바람이 되었을 수도 있고, 꽃이 되어 다시 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가 가꾸는 화단에 묻었으니 그곳의 다른 식물들의 영양분이 되어주며 어떻게든 그 새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죽은 새를 발견했을 땐, '왜 하필 여기서 죽어가지고...'라는 생각이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하필 내 집 발코니에서 죽어줘서 고맙다. 발리에서 새들 덕분에 즐거웠는데, 그 감사함을 너를 묻는 행위를 통해 돌려줄 수 있게 해 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