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에 날아가버린 나의 다짐
Nyepi, The Day of Silence.
오늘은 발리 달력인 사카력으로 발리의 새해다.
오늘은 사카력으로 1945년.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 끝났네, 휴~).
많은 문화에서 자신들 만의 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발리도 그런 줄은 처음 알았다.
어젯밤 제대로 악령들을 가지고 논 발리 사람들.
일종의 엑소시즘과도 같은 어제의 행사를 보고 나니, 전통의 의미를 떠나서 오늘 왜 모든 사람이 집에 있어야만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Ogoh Ogoh(오고오고)를 짊어지고 흔들어대고 덥고 힘들었으니 오늘 하루는 쉬어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아무도 집에서 나오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조명도 키지 않음으로써 악령들이 이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믿게 만들어서, 사람에게 들러붙지 않고 바로 섬을 떠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 생각이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쉿, 야 불키지마. 소리 내지 마. 조용히 해!!! 지금 우리 악령들 속이고 있단 말이야. 우리 이 섬에 있는 거 악령들이 발견하면 안 돼...!" 대충 이런 느낌인가 보다. 숨바꼭질 한 번 제대로 하는 발리 사람들.
The Day of Silence, 오늘은 4가지의 금지된 것을 지켜야 하는데,
1. No Fire. 그래서 조명을 켜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밤, 숙소 정원에 나가보니 칠흑같이 어둡다. 공동 조명은 킬 수 없고, 방에서 각자 최소한의 조명만 킨다고 한다. 나도 이걸 존중하기 위해 침대 스탠드 하나만 켜두었다.
2. No Travel. 정말 놀랍게도, 공항마저 닫는다. 발리 사람들 전통 한 번 제대로 지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이 섬에서 비행기의 이착륙을 하지 않고 공항을 닫는다니, 발리 사람들, 대단하다.
3. No activity. 모두가 쉰다.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그냥 쉰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닫는 것이다.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길거리 곳곳에 경찰들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집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그럼 경찰들은 No activity의 룰을 지키지 못하는 건데, 이건 좀 모순스럽다 싶었다. 아무튼. (혹시 이 날을 위해 발리 사람이 아닌 다른 섬 출신 경찰들이 파견되어 오나 궁금했다.)
4. No entertainment. 통신사도 차단된다고 들어 '설마'했는데, 다행히 우리 숙소에서는 와이파이를 끄지 않아 주어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와이파이를 꺼보니 신호가 아예 잡히지 않는다. 정말로 통신도 끊어버린 것이다. 정말 놀랍다, 전통을 이렇게 화끈하게 지킨다는 것이.
내가 지금 묵고 있는 홈스테이의 집주인은 나랑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어릴 것 같은데 8살, 12살 정도로 돼 보이는 아들 둘과 이 집에서 살고 있다. 아들들이 참 착한 것 같다. 하우스키핑도 아들들이 하고, 오늘 내 음식 서빙도 큰 아들이 했다. 어려서부터 엄마를 도와 홈스테이 일을 한다는 것이 나중에 아들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오지랖퍼적인 생각을 했다. 싱글맘인지 남편은 어딘가 멀리서 일하는지 아들과 셋이서만 사는 것 같다. 요리도 잘하고 홈스테이를 높은 리뷰로 유지하는 부지런함과 수완으로 보아 남편이 무슨 연유에서건 없더라도 혼자서라도 아들 둘을 잘 키워낼 것 같은 여자였다. 심지어 무척 예쁘다.
나도 오늘 Day of Silence에 동참하기 위해, 아침에 엽서를 적어 프라티(집주인)에게 보여주었다.
[Happy Nyepi Praety, 나 오늘 묵언수행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여기에 적었어. 아침은 팬케이크와 커피로 할게. 그리고 내 방은 매일 청소해주지 않아도 돼. 깨끗하게 써서 괜찮아. 마투르쑥쓰마 (발리어로 감사합니다)]
내 엽서를 읽은 프라티는 웃었고 나에게 마투르쑥쓰마!라고 대답했다. 큰아들이 나에게 조식을 가져다주었고, 나는 눈인사로만 고맙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하루, 침묵 수행이 잘 되어가고 있었다. 밖에 나가지 못하는 하루의 지루함을 잘 버텨보고자 '당신은 지루함이 필요하다'라는 책도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고, 내면에 집중하는 하루가 되기 위해 인스타그램 앱도 지웠다.(결국 저녁에 다시 깔았다...). 원래 조식만 주는데 오늘은 손님들이 외출을 할 수 없는 예외적인 하루기 때문에 프라티가 오늘은 저녁도 준비해 주겠다고 말했었다.
점심을 못 먹어서 배가 고팠는데 반갑게도 다섯 시에 일찍 저녁을 가져다주었다. 큰아들이었다. 나는 눈인사로 고맙다고 했는데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큰아들이 갑자기 묻는 것 아닌가.
"왓츠유어드링크? 커피? 티?"
내 오늘 하루의 세계가 통째로 흔들렸다. 지진이 나고 말았다. 진원지는 큰아들.
나는 이 간단한 질문에, 하루 종일 침묵과 함께 이어져 오던 평정을 잃었다.
'나 지금 묵언수행 중인데...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차가 마시고 싶긴 했다. '아 어떡하지... 드링크 필요 없다고 표현하려고 해도 말은 해야 하네 어쨌거나'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무시하면 상처받겠지?'
'고개를 도리도리 하면 알아듣고 떠나려나?'
'어차피 입을 열 거라면 차를 달라고 해야지...'
결국 9시간의 침묵을 깨고 말했다. "Tea, please". 하... 이 한마디만 아니었어도 오늘의 묵언수행 지킬 수 있었는데... 내 속도 모르는 큰아들은 심지어 '그린티?'라고 또 물었다. 으아...
"Yep" (무슨 티가 중요한 게 아니야. 묵언수행이 깨졌어...ㅠㅠ)
아주 찰나의 순간, 나에게 말을 건 이 집 큰아들이 원망스러웠다. 왜 내게 말을 걸었니 ㅠㅠ
묻지 않았다면 나도 대답하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차 안 마셔도 됐을 텐데...
아니면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걸 그랬나. 아흑.. 이미 늦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고,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아 침묵할 수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먹고 나서 빈 접시를 부엌에 가져다주며 프라티에게 "땡큐베리머치, 잇 워즈 쏘~~ 굿"이라고 했다. 그녀의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저 세 번의 순간 말고는 오늘 단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묵언수행은 고작 차 한잔 마시겠다고 깨져버렸다. 하지만 결국엔 다시 감사했다. 묵언수행을 지켰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나는 발리 사람들의 전통을 존중하고 같이 지키기 위해 노력을 했다. 방 안의 불도 정말 어두워지고 나서야 켰고, 내 안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노력했다. 지루함을 직방으로 맞고도 굽히지 않았다.
실제로 The Day of Silence는 발리 사람들이 정말 묵언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불을 켜지 않고 일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이 문을 열지 않는 그런 의미의 Silence 같았다. 오히려 외국인인 내가 Silence라는 단어를 너무 일차원적으로 생각하고 묵언수행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나 보다.
나는 프라티와 아들이 오늘도 평소처럼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다만 어제처럼 큰 소리로 말하지 않고 조금 더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굳이 저녁을 주지 않아도 됐는데 저녁을 차려 준 프라티와, 그걸 서빙한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었다.
내일 아침 6시, Nyepi가 끝나면 프라티와 그 아들에게 말을 많이 걸고 싶다.
아들에게 몇 살이냐고도 물어보고, 어제 음식을 가져다줘서 고마웠다고도 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