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좀 거시기한 것만 빼면...
발리에 도착했다.
우기 끝무렵이라 살짝 걱정했는데 날씨는 정말 빤타스틱하고,
이 동남아의 덥고 습함이 주는 특유의 냄새와 공기에 스며든 에너지엔 사람을 지치게 하면서 기분 좋게 하는 마법이 있다.
어제 발리공항에 도착해서 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택시로 이동하다 보니 배가 무척 고팠는데,
숙소에 도착해 무겁던 배낭을 던져놓으니, 배가 고픈 것보다 동네 구경을 먼저 하고 싶어 어슬렁어슬렁 동네를 걸었다.
이곳은 Padangbai라는 곳. 윤식당으로 유명한 길리나 롬복을 가는 페리를 타는 선착장 마을이다.
이곳에 선착장이 없다면 관광객들은 굳이 지나칠 일이 없을 것 같은 작은 항구 마을이다.
주린 배를 참고 간 블루라군이라는 해변은 생각보다 예쁘지 않았고, 쓰레기 태우는 연기가 너무 심해 수영도 못할 것 같아 실망한 채로 터덜터덜 걷던 중에, 발리에 오면 꼭 먹고 싶던 음식을 발견했다. 군옥수수.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진짜 찜통인 그릴을 앞에 두고 옥수수를 굽고 있는 아저씨와 옆에서 프렙을 하시는 아주머니. 두 분은 관광객을 향한 글로벌마케팅엔 관심이 없으신 듯했는데, 옆에서 노가리를 까고 있던 손님 한 명이 영업을 했다.
"유원투 트라이? 온리 텐 싸우전드. 베리 딜리셔스"
아 이 옥수수, 발리 명물이라던데, 단 돈 900원이라니...!
아주머니가 옥수수 껍질을 벗겨서 아저씨에게 건네면, 아저씨가 자신도 거의 같이 익어가며 구운 옥수수를 아주머니에게 다시 건네고, 아주머니가 버터와 삼발 비슷한 매운 소스를 발라서 손님에게 건네는 시스템이었다.
버터의 고소함과 삼발의 매콤 달콤함이 어우러져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나를 영업한 로컬 손님은, 지나가던 다른 외국인에게 또 마케팅을 펼쳤고, 내가 맛있게 먹는 걸 쳐다본 그 서양여자도, 옼ㅋ하며 옼수수를 기다렸다.
앉아서 집중해서 먹고 싶어서 바로 그 옆에 앉아서 먹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나의 등을 톡 치셨다.
뭐지? 하고 쳐다보니 수줍게 냅킨을 한 장 건네주셨다.
내가 살면서 가장 기대하지 못한 순간에 건네받은 냅킨이었다.
900원짜리 옥수수를 파는 노점상에서,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냅킨을 주시다니...
지붕 있는 멀쩡한 식당에 가도 요구하기 전엔 냅킨 안주는 곳도 많은데, 그 따뜻함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발리에 와서 처음 먹은 음식이 너무 싸고 맛있다 보니 감동해서 이름을 물어봤다.
"왓츠더네임오브딧스?"
"Jagung Bakar." 자궁 바카르.
아, 옥수수가 여기 말로 자궁이구나...!
인도네시아 음식 이름은 주로 메인재료+요리방식으로 짓는다고 했는데 (나시고렝=밥 볶음, 미고렝=면 볶음)
자궁 바카르 역시나, 바카르한 자궁. 즉, 그릴에 구운 옥수수를 뜻했다.
이름이 조금 거시기했지만, 글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던 이 옥수수는 신성하기까지 해서
자궁이라는 이름이 어울리기도 했다.
내가 착상되고 잉태된 신성한 곳이 아닌가...!
오는 길에 택시기사에게 물어봐서 배운 '자안~'을 써봤더니 아주머니 아저씨 두 분 다 좋아하셨다.
발리 말로 맛있다는 뜻이다. 안녕? 고마워. 맛있어! 여행할 때 가장 먼저 외우는 3종세트다.
심지어 낙후되었다고까지 느껴진 이 작은 마을의 노점상에서, '자궁 바카르'를 먹으며 마치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처럼 따뜻한 경험을 했다. 옥수수도 맛났지만, 수줍은 미소와 함께 건네진 냅킨 한 장은 감동이었다.
발리를 떠나기 전에 꼭 다시 먹어야겠다. 자궁 바카르...!
이제 길리로 가자.
바이 빠당바이!!!
길리에 또 가게되어 이 마을에 다시 들른다면 이 아주머니 아저씨 여전히 계시나 다시 찾아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