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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지하다 Mar 16. 2023

끝까지 짐 안 싸는 여자

회피처로서의 글쓰기

지금 시각은 오전 11시 30분.


1년 만에 휴가다운 휴가를 간다! 목적지는 발리, 빨리 가고 싶다.

비행기는 오늘 밤 9시. 집에서 늦어도 6시엔 나가야 한다.

공항에 7시 30분 즈음 도착하는 것이 목표! (결코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하는 법이 없다.)


휴가는 2주가 좀 넘는데, 나는 아직 짐 싸는 걸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시작하면 좋을 텐데 나는 며칠 동안 쓰지도 않던 브런치글을 쓰기로 했다.

공부하기 싫을 때 책상정리하고 손톱 깎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짐을 이다지도 Last minute(마지막 순간)에 싸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왜 짐 싸기에 있어서 이렇게도 '회피형'인 것일까?

왜 짐을 싸기 싫어서 나는 글을 쓰고 있을까...


첫 번째로, 짐 싸는 것이 너무 귀찮다.

살면서 짐을 너무 많이 싸서 그런지, 내공이 쌓이는 것과는 반대급부로, 짐 싸는 것이 지긋지긋해졌다.

그렇다... 많은 핑계 가운데 가장 나에게 솔직하자면, 나는 짐 싸는 것이 너무나 귀찮다.

여행은 여전히 설레지만, 설레는 나에게 짐 싸기란 설렘을 돕는 일이 아닌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다.

내가 연애에 있어서 가장 회피하고 싶은 타입은 '회피형' 인간이다.

하지만 짐을 쌀 때 난 극강의 회피형이 된다.

회피ㅡ 를 입으로 소리 내보니 뜻과는 달리 무척 예쁘다.

회 (입에 살짝 바람이 돌고), 피 (귀엽게 피ㅡ). 살짝 게으르게 발음하면 Happy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지금 짐을 안 싸면 비행기를 놓칠지도 모르는 마지노선 시각에 짐을 싸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것은 자만일 것이나, 짐 싸는데 도가 터서 은근 짐 싸기에 드는 노고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승무원 생활 도합 7년과, 7개 나라에 살러 갔던 내공은 나를 짐 싸기의 달인으로 만들었다.

물론 어느 나라에 살러 가야 할 땐 짐을 조금 더 미리 싸긴 한다만, 여전히 남들보단 훨씬 늦게 시작한다.


나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일단 챙겨야 할 것을 종이에 다 적어논다.

의식의 흐름처럼 적는데, 이것도 하도 해서 그런지 술술술 잘 적힌다. 빼먹는 것도 거의 없다.

변함없이 가장 먼저 적는 것은 '폰, 충전기, 지갑, 여권'...

사실 이 네 가지만 잘 챙긴다면 어느 곳에 여행을 가도 빼먹고 온 것은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일단 종이에 다 적었다면 짐 싸는 것은 시간문제다. (사람에 따라 아닐 수도 있긴 하다...)

이 방법을 굉장히 추천한다...!!!

필수품, 의류, 신발, 가방, 전자기기, 기타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눠서 적는다면 더 수월하다.


네.. 이것이 전부입니다. 별 것 없죠


하지만 나는 어떤 옷을 가져갈지 정확히 적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굉장히 큰 시간을 잡아먹는다.

사실 이것이 내 짐 싸기에 있어서 가장 큰 변수다.

'이거 챙길까?' '이것도 챙길까?' '이것도 가져가고 싶은데...' '혹시 모르니까 이것도?'

그렇게 내 짐이 피사의 사탑이 되어가는 동안,

60L 배낭의 물리적 한계가 나의 탐욕에 제동을 걸어 준다.

실제로 그렇게 꾸역꾸역 가져가봤자 한 번도 입지 않고 돌아오는 옷들도 많은데,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우질 못하는 것도 굉장한 고집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진에 대한 욕심이 줄다보니, 예쁜 옷에 대한 집착도 줄기는 했다.

다행히 발리는 여름옷 위주로 챙기면 되니까 무게도 가볍고, 짐 싸기도 더 쉽다. (과연...?)


사실, 이 글은 짐 싸기를 미루기 위한 도피처로의 글이 되고 말았다.

글쓰기로 도망을 치다니, 비겁하다...!!!

내가 이 글을 마친 뒤 바로 짐을 쌀 것이라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

도서관에 책도 반납하러 가야 하고, 긴 휴가를 가니 엄마 얼굴도 잠깐 보고 올 것이다.

그러고 나면, '지금 시작 안 하면 비행기 못타!!!' 하는 시간에 도달할 테고,

그때쯤 나는 헐레벌떡 짐을 싸고 있겠지.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바쁜 손발과 함께 온갖 욕이 난무하며 배낭이 터질 듯 집을 나서겠지.


나도 짐을 싸며 설레던 그 순간들을 언젠가 다시 되돌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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