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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강철저 Nov 30. 2023

아이는 부모 하기 나름일까?

부모의 영향력은 절대적인가.

같은 부모, 다른 아이들


여섯 살 딸아이와 네 살 쌍둥이 아들들. 세 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기하다. 똑같이 내 배에서 태어났는데 어쩜 저렇게 다르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같은 집에서 자라는데도 아이들이 서로 다른 성격을 갖고 커가는 것을 보면서 궁금해졌다.

인간이 가진 특성의 차이는 유전 때문일까, 환경 때문일까.


교육학에서는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고 아이들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게 행동을 교정하면 아이가 바르게 자란다고 믿는다. 인간은 마치 백지와 같은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부모가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다른 인간으로 자라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교육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에게 10명의 아기들을 데려온다면 내가 그 아이들을 각각 의사, 법률가, 광부, 건축가로 키워보겠다.


다행히 그에게 아기를 데려간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의 육아서들은 부모가 어떻게 해주면 아이가 어떻게 된다는 식의 인풋 input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부모가 아이에게 이렇게 해주었더니 아이가 이렇게 잘 컸다.'라는 말은 곧, '아이는 부모 하기 름'이라는 가정 위에 서 있다. 그래서 자녀가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그 부모가 육아서를 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런 육아서에는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나도 처음 아이를 낳고서는 육아서를 열심히 읽었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아이가 더 잘 크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육아의 정답을 찾아 배위서 내 아이들에게 적용하면 되겠지 싶었는데.. 이상하게 안 통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건데 이 아이에게 맞는 육아 방식이 저 아이에게는 맞지 않았다.


문제는 육아에 어려움이 생기면 내가 뭔가를 잘못한 게 아닌지 불안해진다는 거였다. 아이에게 화라도 낸 날이라면 미안함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내가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어 혹시나 잘못 자라는 건 아닐지 걱정했고, 이런 걱정이 늘어날수록 육아의 즐거움은 줄어들고 자꾸 주눅이 들었다.


그러다가 두 권의 책을 만나고는 '부모가 아이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라는 생각이 어쩌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두 책은 바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와 <양육가설>이다.




문제 아이에게는 문제 부모가 있다?

1999년 미국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끔찍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 3학년 학생인 에릭과 딜런은 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해 12명의 학생과 교사 1명을 죽이고 21명을 다치게 했다. 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저자는  이 사건 속 딜런의 어머니인 수 클리볼드다.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고는 읽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뻔뻔하게 책을 쓸 수 있지? 아이를 잘못 키워서 여러 사람 목숨을 빼앗아놓고, 무슨 할 말이 있어?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고 그런 시선으로 저자를 바라본 것을 반성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가 있는 가정에는 반드시 문제 있는 부모가 있다'라고 생각했다. 총기 난사범이라면 아마도 부모가 아이를 방치했거나 아니면 반대로 억압적으로 양육했을 가능성을 상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딜런은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자란 아이였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총기 난사 전에는 입학 예정인 대학교에 다녀오기도 했고 졸업파티에도 즐겁게 참석했다. 그러나 그 후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총기를 난사해 수십 명의 친구들과 교사를 해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이 그런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다른 어른이나 부모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완벽하게 숨겼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두려운 점이 이거였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과 존중을 받으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도 아이가 아무런 전조 상 없이(부모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학교에서 총을 난사할 수도 있다.  부모의 잘못이 없음에도, 혹은 부모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로 아이의 삶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냉혹하게 느껴졌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몇 차례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다. 만약 우리나라가 총기 소지를 허용하는 나라였다면 미국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만약에 그 부모에게 잘못이 없다면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평생에 걸쳐 자신의 아들 딜런이 남긴 기록과 함께 자신의 교육이 실패한 원인을 찾아간다. 그 과정을 통해 청소년기의 우울증과 뇌장애, 친구와의 관계로 인한 뇌기능 악화 등의 심각성을 알게 된다. 저자는 변명하지도, 아들을 옹호 하지도 않고 오직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러한 발견들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녀는 남은 인생 동안 자신의 아들이 앗아간 이들의 삶을 기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돕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사건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자는 자살방지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뇌 건강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부모인 당신도 자신의 아이에 대해 완벽히 알 수는 없으며, 뇌질환과 자살 성향에 대해서는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부모의 영향력은 절대적인가?

또 다른 책 <양육가설>에서 저자는 흔히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부모가 아이들을 기르는 방식이 아이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양육가설'이라 지칭하고, 이것이 진리가 아님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밝힌다.


이 책을 쓴 주디스 리치 해리스는 원래 아동발달에 관한 대학 교재를 집필하던 사람이었는데, 흔히 알려진 양육가설의 거들이 오독되었음을 깨달은 후 교과서 쓰기를 그만두고,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양육가설의 진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말한다.

부모의 양육 방식이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결정하지 않으며,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사회화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천동설을 믿고 살던 사람들이 지동설을 만났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양육가설>의 서문을 읽으며 진리라고 굳건히 민고 있던 것들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저자는 교육학에서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양육가설 실험의 근거가 얼마나 취약한가에 대해 하나씩 짚어간다.


'부모의 양육방식에 따라 아이들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관한 실험은 마치 '브로콜리를 많이 먹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실험과 비슷한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다. 즉, 브로콜리 섭취 횟수와 건강과의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는 거다. 브로콜리를 자주 먹는다는 건 음식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음을 뜻하고, 그런 사람은 다른 건강관리(운동, 건강검진 등) 또한 꾸준히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양육가설 또한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일 수 있다. '집에 책이 많고, 부모가 책을 자주 읽어주고, 민주적으로 아이를 대하는 가정의 아이가 성공적이다'라는 사실은 부모가 읽어주는 책의 양이 원인이 아닐 수 있다. 책을 좋아하는 만큼 정적인 부모 기질이 아이에게 유전된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책 이야기를 주로 하는 분위기라 자기도 친구들과의 대화에 참여하려고 집에서 책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지금까지 교육학에서 '부모의 양육 방식의 차이가 자녀에게 어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룬 것에 비해 이러한 연구에서 배제된 실험들도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즉, 양육가설이 성립하지 않는 사례들도 많다.


태어나면 바로 유모의 손에 맡겨져 부모와 어져 자라는 영국 귀족의 자녀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들은 하루의 절대시간을 유모와 께 보내면서 자라고, 조금 크면 이튼스쿨 같은 기숙학교에서 지내느라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이 별로 없지만, 성인이 되면 완벽히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말투와 문화를 갖게 된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유모의 말투나 행동이 아니라, 양육에 거의 참여하지 않은 아버지를 닮는다는 사실은 양육가설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이민가정 자녀들의 사례 또한 양육가설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고국의 언어와 문화를 잃지 않기 위해 부모가 가정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들은 빠르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어린 시절에 습득한 언어와 문화를 잃어버린다. 이러한 사례들은 양육가설로는 설명할 수 없음에도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배제되었다.


이처럼 양육가설이 그저 하나의 신기루임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폐해는 너무나 뚜렷하다. 만약 아이가 행복하지 않거나, 똑똑하지 않거나, 정서적으로 불안하다면 그 부모는 죄책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해 공동체 전체로부터 비난의 화살까지 받는다는 구절을 읽으며 '희생자 비난하기 blame the victim'가 떠올랐다. 어쩌면 세상이 부모를 너무 혹독하게 물며, 부모가   없는 부분까지 탓해온 건 아닐까.


그렇다면 누가 아이들의 성격과 사회성에 영향을 주는가?

저자는 아이들이 어떻게 사회화되는지를 '집단사회화 이론'으로 설명한다. 이 이론에서는 아이들이 부모가 아니라 '또래 집단' 속에서 사회화된다고 본다. 인간의 무리 짓기 본능과 범주화 성을 인류 진화의 역사와 함께 설명한다. 인간이 왜 집단으로 무리 짓고 살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게 사회화되었는지를 살피면서 인간은 부모로부터 사회화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또래를 통해 사회화된다고 설명한다.


부모의 영향력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또래가 주는 영향력이 더 클 수 있다는 말에 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딜런은 에릭과 2인조였기에 총기 난사를 할 수 있었다고 한 부분이었다. 성인 총기 난사범들이 대부분 홀로 범행을 저지르는 데 비해, 10대 총기난사범들의 25%는 2인으로 움직인다. 이 2인조의 경우 보통 한 명은 사이코패스이고 다른 한 명은 심한 의존적 성향과 우울에 시달리는 유형이라고 했다. 딱 딜런과 에릭의 모습이었다.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 둘을 떨어뜨리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어떤 교육을 집에서 하느냐보다, 아이와 친구의 역학 관계를 알아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 두 책에서 공통으로 말하고 있다


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양육가설>을 덮으며 '그렇다면 부모 탓이 아니라 친구 탓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는 말로 쉽게 요약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인간이 자아를 형성하는 방식과 사회화되는 과정이 단순하지 않음을, 인간은 순수한 백지나 부모 마음대로 주물러지는 무언가가 아니라 고유한 욕망과 필요를 지닌 존재임을 알려준다.


육아는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영향을 주는 만큼 자녀도 부모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이 책에서는 그러한 영향을 '자녀-부모 효과'라고 부른다. 새로운 용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도와준다. '자녀-부모 효과'라는 용어로 이해할 수 있는 현상들이 있다. 예를 들어, 자녀가 겁이 많고 소극적인 기질이면 부모는 자녀의 활동이나 새로운 시도를 격려하지만,  자녀가 지나치게 활동적인 기질이면 부모는 아이를 통제하려고 애쓴다. 이처럼 자녀의 기질이나 성향에 따라 부모가 다른 육아 방식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자녀-부모 효과'를 무시한 채 어떤 육아 방식이 옳다 그르다 단언할 수는 없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부모의 영향력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해 육아가 좀 더 쉬워지고 부모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기를 바란다고. 나는 자가 말하고자 한 바를 조금은 이해다. 내 아이들 또한 내 품을 통해 태어났지만 나의 일부는 아니다. 출생과 동시에 줄이 끊어졌음에도 여전히 영양분이나 독소가 전해질 거라고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한편, 양육가설의 대안으로 제시된 '집단사회화 이론'을 접하면서, 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아이 주의 다른 아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이 엇나가지 않게 도와주는 어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일은 그러니까,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았다. 내 아이가 잘 려면 이웃의 아이들도 함께 잘 커야 한다. 결국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므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좋은 교우관계를 맺고 건강한 사회성을 기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내 자식들이 잘 자랄 수 있게 만드는 길이라는 깨달음이 생겼다. 교사로서의 정체성과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정체성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미래에 속해 있고 부모는 현재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양육가설> 첫 장에 나오는 칼릴 지브란의 시를 다시 읽어본다.




자녀들은 당신을 통해 왔으나 당신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당신함께 있으나 당신의 소유는 아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으나 생각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몸은 가둘 수는 있지만 마음까지 가둘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당신이 꿈속에서라도 방문할 수 없는 곳입니다.

당신이 그들처럼 되고자 할 수는 있겠으나

그들을 당신처럼 만들지는 마십시오.

삶은 거슬러 가지도 않으며 어제에 머무르지도 않기에.



이 글은 교육격월지 <민들레 150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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