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질문에는 옳은 답이 나올 수 없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보고.

by 대강철저

1. 인생은 답이 없는 문제들의 연속이지만.


비가 오는 날. 뭔가 기분이 다운되고 우울해지려고 할 때마다 수학 문제집을 꺼내서 풀어보곤 했었다. 인생은 답이 없는 문제들의 연속이지만 수학은 답이 있는 문제들만 품고 있으니 나는 그 답을 찾기만 하면 되니 좋았다. 하나씩 해결할 때마다 성취감 버튼을 푸슝 푸슝 누르는 듯했다. 오랫동안 문제를 붙들고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굴려 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답이 툭 굴러 떨어져 나오는 과정을 나는 좋아했다.


수학을 좋아하고 잘하는 것은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수학을 잘하는 '여학생'이 드물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중학교 때보다는 고등학교에 가서 더 수월해졌고, 이과에 가고 나선 내 집인 듯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과목보다 수학 성적이 잘 나오면 학교생활이나 입시에 이득이 많다.


대치동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고 대치동 키즈인 것은 아니다. 대치동에 있는 중고등학교를 나왔지만 나는 대치동에서 학원을 다니지 못했다. 우리 집엔 나 말고도 동생이 둘이나 더 있었고 외벌이 회사원인 아빠가 벌어오는 돈으로는 대치동 학원 비용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한 달에 20만 원만 내면 전과목을 가르쳐주는 다른 동네의 종합학원을 제 발로 찾아갔다. 학원 버스도 우리 동네까지 왔고 자습실도 주는 곳이라 별다른 추가 비용이 더 들지 않았다. 나는 가성비 끝판왕 K장녀였다.


수학은 아무래도 학생들을 변별하기 쉬운 과목이기에 그 종합학원에서도 선두를 달리게 되었고 성적장학금으로 6개월을 공짜로 다니기도 했다. 중학교 때보다 고등학교에 가서, 2학년에 이과에 간 이후로 수학은 내게 일종의 자부심이 되었다. 비싼 과외를 받거나 족집게 강사에게 돈을 쏟아붓지 않아도 나의 노력으로 실력으로 해낼 수 있는 게 수학이라는 자부심.






2. 틀린 질문에는 옳은 답이 나올 수 없다.


그러나 수학은 내게 도구였다. 입시의 도구이자 남들보다 잘하기에 수월한 도구. 문제가 주어지면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니까 옳은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지 문제가 옳은 질문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문제에 대한 생각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럴 시간에 빨리 답을 찾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한 장면, 주인공의 말에 나는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틀린 질문에는 옳은 답이 나올 수 없다.

질문이 옳은지에 대한 고민 없이 허겁지겁 답을 찾는 학생의 모습은 마치 내 모습 같았다. 그러니까 문제 상황에 대한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을 찾아놓고 답이라고 우기는 모습이. 하지만 아무리 답이라고 우겨도. 틀린 질문에는 옳은 답이 나올 수 없다. 맞는 말이다.


다시 그가 낸 문제를 바라본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착시일 수도 있다. 우리의 시각은 우리의 생각만큼 믿음직하지 않다. 착시에 관련된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무엇이 잘못인지 알기 어렵다. 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선입견일수 있다. 도형이 그려져 있고 점, 선, 면에 수치가 쓰여있으면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선입견. 수학에서는 3차원 도형도 2차원 종이에 투사해서 그림을 표현하기도 하기 때문에 이렇게 수치가 적힌 도형에 대해서는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문제를 풀기 쉽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도형을 다루는 순간 여기저기 모순이 나온다.


그러니까 질문이 틀렸다면 내가 찾은 답들은 모순이다. 내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면, 고민을 하고 있다면 최소한 내가 던지는 질문이 옳은 질문인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삽질만 하는 것이니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것은 그 답이 무엇이든 오답이다.


지금 나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고민들, 현실적이고도 생활밀착형인 질문들을 핀셋으로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하나씩 살펴본다. 이 질문은 옳은 질문인가?


'옳은 질문인가'라는 기준 하나만으로도 탈락되는 수많은 질문들이 있다. 가령 예를 들어,


나는 왜 혼자 아이 셋을 못 보는가?


와 같은 질문들. 5세 딸과 3세 아들 둥이를 키우며 가장 안타까운 사실은 내 손이 두 개뿐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밖에 나가면 삼단 분리되는 아이들 때문에 항상 손이 부족하다. 마음이 급해 다리가 꼬여 혼자 엎어지기도 한다. 남편이 주말에 근무하는 날이면 양가 어머니들께 번갈아 부탁을 드리는데 그때마다 괜히 민망했다. 나는 왜 혼자 아이 셋을 못 볼까? 나 좋자고 낳은 아이들을 왜 혼자 못 키우는가? 이 질문에 종종 괴로웠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인간은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의 질문이 틀렸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답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 틀렸다. 옳은 질문이라면 이것이다.


내가 아이 셋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이것이 옳은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질문이 옳기 때문에 답을 찾는 과정은 의미가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씩 찾아가면서부터는 자괴감을 느끼기보다는 자긍심을 느낀다. 나는 아이 셋을 잘 키워내기 위해 방법을 하나씩 찾아가고 있으니까. 혼자 내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주저앉고 싶다. 그러나 인간이 원래 혼자 키울 수 없게 진화해 왔다면 나는 육아 환경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거다.


기본적으로는 남편과 내가 주가 되는 2인 3각 육아이지만 어린이집과 양가 부모님의 도움도 필요할 때엔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아이들을 건강하고 안전하게 키우는 것이 목표라면 그 외의 것은 기대치를 낮춘다. 요리, 청소, 설거지 등의 집안일은 최소한으로 하고 종종 외주를 맡기기도 한다. 집안에서 생기는 각종 대소사를 결정하는 것은 남편에게 맡긴다. 접시 세 개를 동시에 돌리는 곡예를 하는 것 같은 매일의 세 아이 육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는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글을 쓰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하고 나의 삶의 방향을 세운다.


옳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를 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옳지 않은 질문들에 무방비상태로 답을 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다. "나는 왜 저 엄마처럼 엄마표 유아식을 못하지?" "나는 왜 저 여자처럼 날씬하지 않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틀린 질문에는 답을 찾지 않는다.





3. 증명이 되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맞다고 해도 나도 그럴 거라고 선뜻 동의하지 말고, 직접 증명해보지 않았다면 믿지 말아야 한다고 주인공은 이야기했다. 증명을 한 것에 대해서만 믿을 것. 남들이 나의 존재를 부정하더라도 내가 내 자신의 의미를 증명할 수 있다면 버틸 수 있다.


아이를 처음 낳고 키워보면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점은 육아란 끝없이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성취감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작은 성취감이라도 느끼려고 수학문제지를 풀었다. 육아가 장거리 마라톤이라면 나는 지금 제대로 뛰고 있는 건가? 끊임없이 물으며. 그런데 육아란 답이 정해진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증명을 해야 하는 문제였다.


이제는 인생을 수학 문제처럼 냅다 풀지만 말고 옳은 질문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내가 옳은 질문을 했다면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는 넘쳐나는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기보다는 내가 증명한 것들을 기반으로 나아가고 싶다.


남들이 쉽게 하는 말들이 쌓여 나를 흔들도록 놔두지 않겠다. 내 인생은 내가 증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