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술은 문외한이지만...
고백건대 나는 박물관이나 미술 전시회 같은 예술 분야에는 문외한이다. 그림이나 음악을 통해 감흥을 느낀 경험이 별로 없을뿐더러 찾아가서 직접 보고 듣는 것에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수집가의 초대>는 하도 예약이 어렵다길래 대체 얼마나 대단한가 싶어서 가보게 되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안 갔으면 후회할 뻔했다. 나는 전시를 보는 내내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들에 당황했다. 그림들은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제목처럼 <어느 수집가의 초대>는 누군가의 집으로 초대를 받은 듯했다. 대문을 형상화한 조각과 작은 장승들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액자에 꽂힌 그림들은 내 발걸음을 자꾸만 멈춰 세웠다.
2. 가족이란 무엇인가.
박수근이 그린 <아기 업은 소녀> 그림에서는 한참을 서있었다. 전쟁이 나고 삶이 파괴되었을지라도 막냇동생을 업고 있는 여자 아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있다. 옆집 친구는 학교에 간다던데.. 나도 가고 싶지만 등에 업힌 막내를 봐야 하는 상황. 아쉽지만 그렇다고 절망스럽지 않고 꿋꿋이 현재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삶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어떨 때는 어깨를 누르는 짐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떨 때는 등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온기일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지금의 내 얼굴에는 이런 미소가 있나? 돌아보았다.
<현해탄> 이중섭, 1954
이중섭의 <현해탄>은 너무나 행복하게 웃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고 이중섭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그림이었다. 곧 만나러 가겠다는 편지에 함께 동봉했다는 이 그림은 만남에 대한 그의 의지와 기대감이 느껴졌다. 그림 옆에 작은 안내판을 보니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954년이고 그의 사망연도는 1956년이었다. 이렇게 희망에 차 있던 그는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죽었다. 이 그림을 그려 편지에 넣어 보낼 때 그는 자신의 미래를 알았을까? 짙은 푸른색의 바다의 깊이가 다시 보였다. 너무나 가까이 있지만 다가갈 수 없을 만큼 깊은 바다가 가족을 가로막고 있다.
<춤추는 가족> 이중섭, 1955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 그림 앞에서는 그의 애틋한 그리움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가까이서 보면 형태가 또렷하지 않은 그림이지만 멀리서 보거나 사진을 찍어서 보면 형태가 보이는 신기한 그림이기도 했다. 아내와 두 아이들과 함께 '둥글게 둥글게'를 하며 웃고 있는 듯한데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림 속에 얼핏 보이는 그의 얼굴이 작가의 실제 웃는 표정과 비슷해 보여 신기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다시 만나 춤추며 함께 웃고 싶은 그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955년 그의 사망연도는 1956년. 나는 혼자만 그의 미래를 알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할 지경이었다. 이러한 간절한 그리움을 그는 어떻게 달랠 수 있었을까.
3. 세상에 좋은 텍스트를 많이 남기고 싶다.
박수근과 이중섭의 그림을 통해서는 그나마 가장 최근의 근현대사가 느껴졌다면 더 오래 전의 우리 조상들이 남긴 글과 그림,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졌다. 그러니까 이 물건의 주인들은 다 사라져서 없어진 지 오랜데, 이 물건을 만들고 쓰고 전달한 사람들은 모두 죽고 사라졌는데, 이 물건들만 남아 이곳에 와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 물건에 닿은 손길은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상상해본다. 100년 후 나와 내가 알던 사람들이 모두 죽고 나서 남겨질 물건들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정말로 남겨지길 원하는 물건이 있을까?
백 년 전, 2백 년 전의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친근함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들도 나와 같은 땅에서 같은 감정으로 느끼며 사는 하나의 인간이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친구들과 계모임을 한 것을 그림과 글로 남겨놓은 문서를 보면서는 저번 주에 간 친구 계모임이 떠올라 웃었고, 경주 불국사의 겨울 풍경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는 몇 해 전에 다녀온 경주의 모습이 떠올라 친근했다. 산과 강이 보이는 곳에 앉아 풍류를 즐기는 그림을 보니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계곡으로 가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산천과 이 사람들은 그저 오고 가는 바람처럼 같은 땅을 스쳐 지나가는구나.
내가 세상을 스쳐 지나가면 남기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미래에 가질 무언가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저 우리 조상들이 산 것처럼 가족들과 함께, 산천을 즐기고, 풍류를 즐기는 삶을 살고 싶다.
지금의 우리보다 더 혹독한 삶을 살면서도 그림과 글과 음악을 남긴 조상들의 모습에서 나는 그들이 만드는 삶의 운치를 눈치챘다. 그들은 여유 있는 삶을 살았기에 그런 기록을 남긴 게 아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글을 쓰면서 돌을 다듬고 조각하면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면서 살아갈 힘을 내었다.
세상에 좋은 텍스트를 많이 남기고 싶다. 나의 육신이 사라지고 내가 알던 모든 이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텍스트는 살아남아 이어질 거라 믿는다. 나의 경험이 개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나의 텍스트는 남아서 어느 누군가에게 가닿는다면 그러한 생생한 삶이 주는 위로가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 현재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삶의 모습을 남겨보고 싶다. 그것이 몇백 년 후 박물관에 남을지 땅에 묻혀 사라질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전달된 텍스트들이 미래의 인간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어느 수집가의 초대>를 다 보고 나오면서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가족이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지금 현재에 감사해라.
친구들과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다.
기쁜 일을 서로 축하하며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많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자연 속에서 유유히 지내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기록으로 남겨둔다면 먼 후세의 사람들이 읽고는
그것을 통해 알아차리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박물관을 나오며 곰곰이 생각했다.
나의 가족과 함께 하는 이 시간들을 감사해야지,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진심으로 대해야지. 글을 써야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좋은 텍스트를 많이 남기는 것이다. 나의 사소한 일상도 나의 생각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가닿으면 그 시대와 인간의 감정을 엿볼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겠다. 결국에는 비슷하지만 각자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리라.
<어느 수집가의 초대>에 들어가기 전의 나와 나올 때의 내가 달라짐을 느꼈다. 이렇기에 사람들이 직접 미술관에 가고 음악회에 가는 거구나. 예술이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구나.
아이를 위한 문화생활 말고 온전히 나를 위한 문화생활이 주는 기쁨을 정말 오랜만에 오롯이 느꼈다. 그리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 내가 얻은 이 힘으로 다시 하루를 꾸려간다. 아이들에게 어떤 삶을 살게 해주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먼저 실험해본다.